등록 : 2008.07.16 21:20
수정 : 2008.07.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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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옥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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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올해로 제헌헌법이 제정된 지 60돌이 된다.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그 헌법이 간결한 노래로 살아 움직이며 기뻐한다. 헌법이 직접 광장으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어원상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완성하려는 투쟁과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체제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촛불집회 역시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를 재확인하고 그 실질적 운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문제제기다.
우리 헌법에도 자유권과 함께 참정권, 법 앞의 평등과 같은 평등권이 국민의 권리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의 권리 행사는 부와 신분에 따라 달라져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강부자’ ‘고소영’으로 평가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헌헌법에서도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경제질서의 기본으로 삼고, 경제상 자유를 이 한계 내로 제한했다.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고 중요산업을 국·공영으로 했으며, 필요에 따라 사영기업을 국·공유화할 수도 있었다.
제헌헌법의 경제질서는 경제주체들의 균등발전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훨씬 선호되었는데,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재산이 사회적으로 소유되어 국민 복리를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제헌헌법은 단정 수립에 반대했던 중간파나 김구 세력마저 참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정되었던 만큼 한계도 있었다.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된 조선임시약헌의 경제체제에는 중간파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계획경제와 노동자대표의 기업경영 참여를 바탕으로 사회민주주의적 혼합경제체제를 추구했다. 제헌헌법을 기초했던 유진오 역시 사회국가의 의미를 담아 자유방임을 수정한 혼합경제 체제를 지향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의 보강으로 기획했던 국민경제회의 규정과 적산의 국유 조항은 채택되지 못했다. 또한 국유화와 국영의 범위도 축소되고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가 대신 이익균점권만 명시되었다.
제헌헌법 경제조항에는 해방 당시 경쟁하던 이념들이 나열되었던 반면 그 구체적 실행은 이후 입법으로 위임했다. 따라서 이들이 유기적 연관을 가진 정책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사회국가 의미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원적인 정치사회 구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54년 2차 개헌으로 자유경제 체제로 전환되면서, 자유경제 체제는 반공을 위한 생산력 증강에 적합한 것으로 예단되었다. 여기에는 원조를 매개로 한 미국의 압력도 컸다. 따라서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북진무력통일에 속박되어 있던 정치사회질서의 다원화를 꾀하고 경제계획과 중요산업 국유화를 통해 자립경제를 확립해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려 했던 조봉암의 사회민주주의는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다.
6월 항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독재정권기에 억압되었던 다양한 가치들이 분출되고 새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자유화로 귀결되어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이제 광장의 참여민주주의를 내실화하여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가려면 다양한 정치주체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경제질서의 기본으로 삼은 제헌헌법의 정신일 것이다.
신용옥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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