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0 22:09
수정 : 2009.09.1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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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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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한 원로학자의 죽음으로 시끌벅적하다. 지난 11일 아흔여덟의 나이로 숨진 지셴린(계선림) 베이징대 명예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국의 주요 매체가 그에게 바친 추모사에는 ‘국학대사’ ‘국보’ ‘학계의 태두’ ‘중국의 지식인’이라는 극한의 찬사가 따라붙는다. 19일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원자바오 총리까지 참석했다.
사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이런 평가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해 12개 고대언어에 능통하고, 그의 연구는 역사와 문학, 미학, 철학을 두루 섭렵한다. 게다가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고문학자, 동방학자, 불교학자, 번역가 등 10여가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가히 ‘걸어다니는 인문학’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국엔 ‘죽어서 대인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죽은 자를 높이는 세태를 가리킨다. 얼마 전 미국의 팝가수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도 중국의 주요 매체들은 그를 하늘 끝까지 치켜세웠다. 그가 중국에 들렀을 때의 공연 기록까지 들춰가며 그의 삶을 재조명했다. 덕분에 한때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팝이 인류를 풍요롭게 한 문화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셴린에 대한 추모 열기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삐딱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을 돌다 보면 그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들은 우선 그에게 붙은 국학대사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인도와 관련된 이른바 동방학인데, 그게 어떻게 국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가 동방학을 국학의 범주로 끌어들였다는 일부 학자들의 해석을 비웃는 지적이다. 중국에서 국학이란 말은 1990년대 서양에 맞서는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면서 회자된 관제언어의 성격이 짙다.
그를 국보나 학계의 태두라고 부르기엔 민망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생전에 중국의 인문학을 발전시킨 대가였다는 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결코 최고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홍콩의 한 블로거는 그를 후스(호적), 궈모뤄(곽말약), 천인커(진인각) 같은 선배들의 면면에 비춰보면 무게가 떨어진다고 품평했다. 역사학자인 천인커는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할 때 비행기까지 세워놓고 기다렸던 학자였지만, 공산당은 한 번도 그를 국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지셴린도 생전에 이런 사람들의 칭찬에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쓴 잡기’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제발 나에게 국학대사니 국보니 학계의 태두니 하는 모자를 씌우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이 사람들의 과장된 표현에 농락당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중국 매체들의 상찬은 그의 학자적 결백을 더럽히는 모욕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중국의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데도 이견을 제기한다. 그가 문화대혁명 때 고초를 겪긴 했지만, 이른바 실천을 강조하는 현대적 지식인의 범주엔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식 구분을 하면, 그는 핵무기를 만드는 연구실에 있었던 학자이지, 핵무기 반대 성명에 서명을 하는 지식인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학자의 현실 참여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식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호랑이를 본 것처럼 겁이 난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중국에서 기품과 기백을 두루 갖춘 지식인의 맥은 1950년대 반우파 투쟁과 60~7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사실상 끊어졌다. 특히 높은 학문적 성취를 깔고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원로를 찾기란 무망하다. 처음으로 원자탄을 만들고,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개발한 영웅은 있지만, 사회를 향해 회초리를 드는 원로는 없다. 지셴린이 죽기 전에 중국에선 이미 지식인이 죽었다.
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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