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7 22:02
수정 : 2009.09.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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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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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다. 지난 5일 밤 9시 민영방송 <티비에스>(TBS)를 통해 방송되기 시작한 <일요극장-관료들의 여름>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 관료들의 이야기다.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막 진입하기 시작한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패전국 일본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풍요로운 국가로 만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통상산업성 관료들의 좌절과 분투를 그리고 있다.
국내 산업 보호를 우선하는 ‘산업파’와 자유무역을 이상으로 하는 ‘국제파’의 공방전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들이 온갖 난관 속에서도 기업을 설득해 국민차를 개발하는 과정이나, 전후 초기 일본의 수출 효자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에서 고도성장을 견인한 일본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성을 엿볼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눈을 떼기 힘든 것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총선 정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볼 때 8월30일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교체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제1야당 민주당은 1955년 이후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유지해온 관료정치의 타파를 최대 총선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실제 <관료들의 여름>에서 나타난 일본 고도성장 초기의 관료상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모습일 뿐이다. 2009년 일본의 관료들은 후덥지근한 일본의 여름 날씨만큼이나 국민의 따가운 눈총 대상으로 전락했다. 청탁을 시도하는 업자나, 관청의 예산 늘리기를 옹호하는 족의원들과 결탁해 쓸데없는 공공공사를 남발하고 낙하산 기관을 만들어 자신들의 철밥통을 유지하는 이익집단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료들의 권력은 메이지 정부 이후 100년 넘게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게 일본의 현실이다. 심지어 정치인 출신의 대신이 사무차관(각 성 관료의 사실상 최고 책임자)의 파워게임에 휘말려 경질되는 사태도 벌어진다.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상당수 총리가 고위 관료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은 자민당 정치가 얼마나 관료에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총리가 국회 답변 때마다 사무관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소 다로 총리의 형편없는 한자 실력이 일본 국민의 조롱을 받고 있는 것도, 관료들이 써준 원고를 자신의 말로 소화하지 못해 빚어진 해프닝이다. 자신들이 정치인들에게 대본을 써주지 않으면 국정이 운영되지 않는다는 의식이 관료들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국회 통과 법률의 90%가량이 관료들의 손끝에서 나온 점을 고려하면 관료들의 강한 자부심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정치인 100명을 파견해 입법 과정을 주도하겠다고 나섰다.
일부 전직 고위 관료들도 관료 의존 정치가 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문부과학성 출신 영화평론가인 데라와키 겐은 “가스미가세키(일본 중앙관청 밀집지역)를 좋게 하는 것은 정권교체다. 민주당이 아니다. 오사카도 지사가 바뀌니까 활기가 넘치지 않는가. 민주당 정권 아래서도 관료들이 바뀌지 않으면 또 정권을 바꾸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료 의존 정치 탈피가 대외정치에서도 반드시 긍정적인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몰이식 정치를 펼쳤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외무성 등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임기간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민주당 집행부가 야스쿠니 참배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자민당보다 전향적이어서 다행이다.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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