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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15 18:29 수정 : 2018.03.15 19:13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지난 13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해고 통보’를 받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씁쓸하게 퇴장했다. 2017년 2월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으니 재임기간이 13개월 조금 넘고 14개월에 다소 모자란다.

2016년 12월11일 트럼프 당선자는 <폭스뉴스>의 ‘선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무장관 결정이 “매우, 매우 임박해 있다. 기막히게 좋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틸러슨 후보자에 대한 후속 질문을 받고는 “그는 세계적 수준의 플레이어”라고 칭찬했다. ‘기막히게 좋은 사람’과 ‘세계적 수준의 플레이어’의 끝은 참 허망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은 틸러슨 장관을 지명할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슐츠 모델’을 생각했을 법하다. 조지 슐츠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노동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하다 세계적 토목회사인 벡텔사 부사장으로 들어가 굵직한 계약들을 따내며 사장까지 올랐다.

8년간 ‘비즈니스맨’으로 맹활약했던 그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2년 알렉산더 헤이그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국무장관 자리에 발탁돼 1989년 1월20일까지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임기를 마쳤다. 슐츠 장관은 국무부 관료조직으로부터 존경받고 레이건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며 ‘행정의 달인’,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국무장관 중 한명’이란 영예를 안았다.

텍사스 출신인 틸러슨 장관은 1975년 엑손에 입사한 뒤 2006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라 10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틸러슨 장관은 “아내의 권유로” 국무장관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그 역시 내심 슐츠를 ‘롤모델’로 생각했을 법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틸러슨 장관은 ‘슐츠 모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주파수’를 맞추는 데 실패했다. 국무부 예산 30% 삭감을 막아내지 못했고 고위직을 축소해 국무부 직원들의 원성을 샀다.

국무부 안에서도 소수의 측근들만을 중심으로 정책을 결정했다. 북한에 대해 백지상태였던 그는, 국무장관의 역할은 북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협상이라는 실무자들의 조언을 초기엔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실무자들의 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틸러슨 장관의 퇴장을 두고 미국 언론들은 “역대 최악의 국무장관 중 한명”, “한 세대 이상 갈 불명예”라는 낙인을 찍었다.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전문가조차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단명한 국무장관이 되지 않기 위해 1년은 잔류하겠다는 그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라고 혹평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의 에드먼드 머스키는 1980년 5월 국무장관으로 발탁됐으나 카터 대통령의 재임 실패로 8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럼에도 지난해 북-미 간 거친 말폭탄과 긴장고조를 막기 위해 육탄방어를 한 그의 노력을 봐온 나로서는 애잔함이 있다. 공과가 어떠하든, 그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연합해 트럼프 행정부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레드팀’ 역할을 했다.

북핵, 이란, 중동 등 어떤 문제든 지금처럼 판 자체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선 레드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트럼프 외교안보팀은 이제 매티스 장관 이외엔 ‘충성파’들로 채워졌다. 충성파들의 모임은 ‘그룹싱크’의 오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인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 국장의 국무장관 지명은 나쁜 소식은 아니다. 북핵 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데는 과감한 조처를 꺼리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워싱턴 주류 엘리트의 계산된 신중함도 큰 원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기대감 속에서도 왠지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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