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1 18:10
수정 : 2019.11.22 17:03
정인환 ┃ 베이징 특파원
‘공권력’이라 한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국가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니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투입은 최소화하고, 행사는 법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6개월째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홍콩에선 특히 그렇다.
카오룽반도를 종으로 가르는 ‘네이선 로드’는 길 자체가 홍콩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영국의 13대 홍콩 총독인 매슈 네이선의 이름을 딴 이 거리는 북쪽 삼수이포에서 남쪽 침사추이까지 이어진다. 도로 밑으로는 프린스에드워드(타이지)-몽콕-야우마데이-조던 등 홍콩 지하철 췬완선이 지난다.
석달여 만에 다시 찾은 홍콩의 거리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19일 오후 타이지 역을 끼고 돌아 익숙한 길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길 한가운데 쓰러져 누운 신호등이었다. 멀쩡히 선 신호등도 점멸 기능을 멈췄다. 지난 11일 시작된 출근길 교통방해 시위가 남긴 흔적이다.
깨진 보도블록이 돌무덤처럼 도로 양편에 쌓여 있었다. 보도블록이 있던 자리는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맨땅이다. 몽콕 지하철역 출구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온통 구호가 도배돼 있다. 도로 중앙분리대도, 바닥도 마찬가지다. 네이선 로드는 홍콩의 오늘을 보여주는 기이한 전시장이 돼 있었다.
야우마데이 역을 지나면서 거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수건으로 코를 막은 이들이 갑자기 늘었는가 싶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파람을 타고 코끝에 와닿은 건 최루탄 냄새였다. 지난 18일 밤 포위된 홍콩이공대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대규모 시위가 네이선 로드를 따라 펼쳐졌다. 진압에 나선 경찰은 이날 밤 최루탄 1458발을 퍼부었다. 최루가스는 도심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도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며 다가서면 대뜸 “신분증부터 보자”고 했다. 10대부터 40대까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지난여름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홍콩의 거리에서 의심이 자라고 있었다.
20일 한낮 홍콩섬 센트럴의 금융 중심가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의 점심시간 연대집회가 열렸다. 지난 6월9일 반송중(중국 송환 반대) 집회가 시작된 이후 간헐적으로 열리던 주중 점심시간 집회는 11일 교통방해 시위 시작과 함께 매일 열리고 있다.
구호를 외치던 시민들이 도로로 나서자, 진압경찰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곤봉으로 방패를 치는가 하면, 최루 스프레이를 치켜들었다. 시민들은 밀리지 않았다. 야유와 함성이 도심 빌딩 숲에 메아리쳤다. 경찰의 위협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이다. 한 경관이 주먹을 쥔 채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자, 시민들이 일제히 팔을 뻗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홍콩 경찰 당국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6월 시위 개시 이후 지금까지 4491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날 밤 네이선 로드 시위에서 200여명이 추가로 체포됐다. 이들을 포함해 이공대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온 시위대까지 줄잡아 1100여명이 불과 이틀 사이에 체포됐다.
“경찰은 총을 가졌고, 최루탄을 가졌고, 물대포를 가졌다. 우리는 무엇을 가졌나? 고작 보도블록뿐이다.” 휴교령 속에 학교에 가지 않은 채 6일 동안 매일 거리 시위에 나왔다는 고등학교 2학년 ‘잉’(16)의 말이다. 지난 6월 반송중 시위 개시 이후 홍콩 경찰이 쏜 실탄에 부상을 입은 시위대는 지금까지 모두 3명이다. 이 가운데 2명이 청소년이다.
inhwan@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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