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2 18:05
수정 : 2019.12.13 10:03
황준범 ㅣ 워싱턴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기사로 다루다 보면 낭패감을 넘어 자괴감까지 들 때가 많다. 대통령의 품격은 진작에 포기한 원색적 표현들이나, 정반대 방향을 왔다갔다하는 예측 불가능성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난감한 것은 보통의 국가 정상들에게 기자들이 하듯이 트럼프의 발언에 뭔가 큰 함의가 있을 것으로 보도하고 나면, 그 뒤 허탈해질 때가 잦다는 점이다. 북-미 관계 관련일 때 특히 심하다. 내 얼굴에 침 뱉기를 감수하고, 최근 3개월만 잠깐 살펴보자.
트럼프는 9월18일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해 북-미 관계를 힘들게 했다면서 “어쩌면 새로운 방법(new method)이 매우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북한이 요구하는 ‘새로운 계산법’에 트럼프가 화답한 것 아니냐는 언론의 해석을 낳았고, 북한 쪽 북-미 협상 대표인 김명길 순회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방법을 주장했다는 보도를 흥미롭게 읽어봤다”고 낚아챘다. 하지만 며칠 뒤 한-미 정상회담과 트럼프의 유엔 기조연설에서 ‘새로운 방법’에 대한 얘기는 없었고, 10월 초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은 합의 없이 끝났다. 되돌아보면 “트럼프가 말하는 ‘새로운 방법’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던 한 소식통의 촌평이 더 정확했던 셈이다.
트럼프는 10월21일에는 “북한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는 중대한 재건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열흘 뒤 북한은 초대형 방사포 시험발사를 했다. 11월17일 그는 트위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당신은 빨리 행동해서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곧 보자!”고 적어 대화 분위기를 띄우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체로 트럼프의 발언은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와 대비해 자기의 성과를 부각하면서 자신만이 해결사라고 과시하는 내용이고, 북한도 그런 맥락에서 언급될 때가 많다.
트럼프의 발언은 북한이 시한으로 제시한 12월 들어서는 액면상 자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2년간 안 쓰던 “로켓맨”을 입에 올리며 “필요하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하고, 김정은이 적대적으로 행동하면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도 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불쾌감을 전하면서 “우리는 더이상 잃을 게 없다”고 치받았다. 하지만 “로켓맨”은 기자들이 ‘당신이 김정은을 여러 번 만났어도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 않냐’는 취지로 묻자 “그는 물론 로켓 발사를 좋아한다”며 방어적으로 답변하면서 나온 것이다. ‘오바마 시절엔 미국 군대가 약했다→지금은 세계 최강이다→쓰고 싶지 않지만 필요하면 쓸 것’이라는 삼단논법 또한 특정 국가와 무관하게 트럼프가 관용구처럼 입에 올리는 말이다. 트럼프가 전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무게는 ‘김정은은 모든 걸 잃어가며 나와의 관계를 깰 사람이 아니다’라며 대화하자는 쪽에 실려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언론에 어떻게 비치고,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떤 파장을 낳을지에 대해 세밀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내뱉는 발언마다 심오한 의도나 의미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북-미 협상 또한 서로의 말에 코를 걸어 공중에 대고 하는 말싸움은 소모적이고 불신만 키울 뿐이다. 아직까지 2017년 같은 직접적인 말폭탄은 자제하고 있는 트럼프-김정은 두 사람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다. 친서 교환이든 특사 교환이든 전화 통화든 두 사람이 직접 소통으로 나서야 한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장거리 발사체에서 대화 재개로 바꿀 기회는 아직 있다.
jaybee@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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