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12 19:07
수정 : 2013.09.1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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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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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가 유럽에서 저변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동력의 하나는 수도원 운동의 확산이었다. 그 운동의 핵심에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이 있었다. 이 수도원의 창시자인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의 규칙>이라는 책에서 수도승의 생활 수칙을 규정했다. 이 규칙은 베네딕투스 수도원을 넘어 중세 거의 모든 수도원에서 받아들이는 이상이 되었다.
<수도원의 규칙>은 수도승의 하루 일과와 생활 자세까지 명시할 정도로 내용이 상세하지만, 크게 봐서 수도승은 정절·청빈·순명이라는 3대 원칙을 지켜야 했다. 풀어 말해, ‘수도승은 결혼하지 않는다’ ‘수도승은 재산을 갖지 않는다’ ‘수도승은 하느님은 물론이고 수도원 내 상급자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받든다’는 것이었다.
수도승이 살아가는 현실과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 원칙이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사실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도원 내부의 권력 다툼은 순명이라는 원칙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중세 말엔 특히 청빈이라는 계율이 문제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대성당이나 수도원은 거대한 재산을 소유한 세력이었는데 수하의 사제들은 청빈을 지키라니. 교회의 재산은 어떻게 정당화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거니와, 교황은 수도승들에게 재산을 소유하라고 명했다. 논리인즉슨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옷’이라는 ‘재산’을 갖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후대에 생겼지만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따라 수도승의 청빈을 베네딕투스 교단보다 더욱 강조하던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반발했다. 물이나 공기는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개인이 소유한 재산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옷도 삶에 필수적이지만 소유물로 간주될 수 없는 ‘우수스 팍티’라 주장하며 사용권과 소유권을 구별하여 청빈한 삶을 옹호했다.
대성전을 경쟁적으로 지어가며 신도들을 자극하는 목회자들이나 그에 맹종하는 신도들 모두 눈여겨봐야 할 덕목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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