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6 19:20
수정 : 2013.11.0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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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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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플리니우스는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키워준 삼촌 대 플리니우스를 이렇게 칭송했다. “신이 호의를 베풀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일을 할 능력이나,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쓸 능력이 부여된 사람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부여받은 사람은 비할 바 없는 축복을 받은 셈인데, 제 삼촌이 거기에 속합니다.”
관리이자 군인으로서, 학자이자 작가로서 그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왕성한 지식욕을 갖고 있었던 그는 어느 지역으로 가더라도 그곳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예컨대 이스파니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곳의 특이한 농경 방식과 금광의 채굴 방법에 눈길을 기울여 기록을 남겼다. 그런 자세가 백과사전적 저작인 <박물지>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관대하게 베푼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주변의 지인과 고향 코모를 위해 막대한 재산을 기부했다.
네로 황제의 폭정이 도를 넘어 공포정치로 치달을 때 플리니우스는 자신에게 관심이 쏠릴 만한 글을 쓰지 않았다. 그 시기에 쓴 웅변술에 대한 글도 내용보다는 형식에 초점을 맞췄다. 웅변의 내용에 대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친구이기도 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등극하여 공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후였다. 신중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용기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던 당시 그는 로마 해군의 사령관이었다. 죽음의 화산재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뒤덮을 때 나폴리만 건너편에 정박해 있던 그는 화산 폭발 현상을 직접 목격하고자 만을 가로질러 폼페이로 향했다. 그때 그곳에 있는 친구에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갈이 도착했다. 구조를 위해 스스로 쾌속선을 탄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배는 폼페이에서 역풍을 만나 움직이지 못했다.
베수비오의 노한 불길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난 뒤 그의 시신이 화산에서 날아온 부석 더미 밑에서 발견되었다. 외상은 없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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