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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4 18:42 수정 : 2015.11.04 18:42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에서 유대인은 악몽을 맞았다. 이전까지 누리던 독일 시민의 권리를 잃은 것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 선전의 희생자가 되어 1차대전 패배는 물론 독일 경제 몰락의 원인으로 낙인찍혔다. 점차 생존권마저 위협받던 그들은 급기야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해 시민권을 빼앗기고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과의 결혼까지도 금지되었다.

유대인은 해외에서 도피처를 구해야 했으나 그들을 받아주는 곳조차 별로 없었다. “세상은 유대인이 살 수 없는 곳과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계 유대인을 추방했으나, 폴란드에서는 그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난민이 폴란드로 가면 폴란드 군인이 그들을 다시 독일로 보내는 일이 빗속에서 이어졌다. 음식도 피신처도 없었다.

그중에 그린츠판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파리에 체류하던 17살의 아들 헤르셸에게 엽서를 보냈다. “무슨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그렇지만 이게 곧 끝장이겠지. 한푼도 없는데, 뭐를 보내줄 수 있을까?” 헤르셸은 뭔가를 보내는 대신 권총을 사서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찾아갔다. 그리고 외교관 폼 라트에게 발사했다. 사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처우 때문에 나치에 반대하여 비밀경찰의 내사를 받던 인물이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폼 라트가 사망했다. 그 소식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퍼지자마자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나치 정부는 개입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그들의 선동에 넘어간 대중이 폭도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8년 11월9일 하룻밤에 최소한 91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자들이 자살했다. 유대인 예배당과 상점과 집이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이것이 ‘수정의 밤’이었다.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 아니었다. 길거리를 뒤덮은 유리 조각을 수정에 빗대 만든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극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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