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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4 18:22 수정 : 2017.09.14 20:12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이탈리아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총애를 받으며 18세기 말 오페라의 발전에 큰 흔적을 남겼다. 글루크의 제자였던 그는 세 개의 언어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오페라 어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명성 높은 밀라노의 오페라하우스 ‘라스칼라’의 개관 기념 공연이 그의 오페라였으니 당대에 그의 명성은 최고였다. 1804년 이후론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어도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은 대단해 슈베르트, 베토벤, 리스트가 그의 제자로 꼽힌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아니, 오명으로 기억된다. 그 모든 것이 연극에서 묘사된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시작은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했다. 그의 시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살리에리가 질투심에서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전거가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바탕을 둔다. 게다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 막짜리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치명타는 영국의 극작가 피터 섀퍼에게서 왔다. 그의 희곡 <아마데우스>는 독살 이야기를 정교하게 가다듬어 플롯에 신빙성을 배가했다. 그 성공은 연극에 머무르지 않았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오른 뮤지컬은 1981년에 토니상을 받았다. 다음 차례는 영화였다. 섀퍼 스스로 시나리오로 각색한 이 작품에 밀로시 포르만 감독이 가세해 결국 1984년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만들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독살범으로 굳어졌다.

음악학자들은 섀퍼가 그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모두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둘 사이에 라이벌 의식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모차르트의 음악도 지휘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거들떠보지 않던 살리에리의 음악이 연극과 영화 이후 새삼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살리에리에게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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