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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7 18:53 수정 : 2017.12.07 19:26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50년대에 프랑스는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1952년에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1957년에 알베르 카뮈가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연배라고 착각할 수 있겠으나 모리아크가 서른 살 가까이 연상이었다. 그 둘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이어졌다.

무신론자였던 31세의 청년 카뮈는 자신이 편집장이었던 레지스탕스의 기관지 <전투>에 나치 부역자들의 처리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엄정한 사법부에서 엄격한 재판 과정을 통해 부역자들을 처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59세의 가톨릭 신자 모리아크는 나치 점령 당시에는 미뉘 출판사에서 비밀리에 출판되던 <피가로지>에 기고하고 있었다. 모리아크는 그러한 처단이 초래할 권력 남용을 경고했다. 그러한 처단은 갓 태어난 프랑스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기에 부역자에 대한 재판은 나치의 방법과는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과거의 청산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복수가 아닌 화해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뮈의 반론과 모리아크의 재반론이 계속 이어졌으나 기본적인 논조는 같았다. 젊은 카뮈는 레지스탕스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시 정권의 법과 결별하여 정의를 행사해야 함을 강조했다. 노년의 모리아크는 연륜을 반영하듯 실제로 그러한 처단이 초래하게 될 국론의 분열과 형평성의 상실을 우려했다. 그런데 사태는 모리아크가 우려하던 대로 흘러갔다. 평결에는 일관성이 없었고, 각 정파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부역자의 처단을 이용했던 것이다. 2년 뒤 카뮈는 모리아크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판결은 갈등을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최종적인 화해를 향해야 한다고 견해를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카뮈와 모리아크 모두의 주장에 부역자들의, 또는 그들을 위한 목소리는 없었다. 적폐 청산의 문제에서 적폐의 발언권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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