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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4 19:43 수정 : 2018.05.24 19:51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예술가와 문필가로도 성가를 높였던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훗날 네 권으로 간행된 <영어 사용 국민의 역사>의 초고를 집필할 무렵 옥스퍼드 대학교를 갓 졸업한 연구 조교 앨런 불록의 도움을 받았다. 2차대전 이후 교수가 된 불록은 학교의 행정에도 크게 기여하여 옥스퍼드의 장학 기금을 크게 확충하며 부총장으로 재직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역사가로 기억한다.

1952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 <히틀러: 독재의 연구>는 히틀러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전기였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기록에 근거하여 집필한 이 책은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히틀러 연구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논지란 히틀러는 기회주의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던 정치인으로서, 아무런 원칙도 신념도 없었던 사기꾼에 불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이 학계를 지배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반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망 높은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가 그의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히틀러에게는 아무리 반동적이었다 할지라도 신념이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2004년 불록이 사망한 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는 “히틀러가 막후의 음모를 통해 권력을 얻었다는 불록의 명제는 세월의 검증을 버텨냈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고인에게 호의적으로 쓰는 것이 동서고금의 인지상정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쓴 저작이 새로운 해석과 증거의 홍수 속에서 거의 40년 동안 버텨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근자의 평가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불록 자신은 논쟁의 과정에서 더 성장했다. 이후의 저서에서 히틀러에게는 최소한 <나의 투쟁>에서 보이는 이념이 존재했음을 인정했고, 개인의 힘보다는 사회적 동인이 역사를 움직이는 더 큰 요소라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불록에게 영국의 왕실에서는 기사의 칭호를 넘어 작위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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