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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9 17:02 수정 : 2019.05.09 19:18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메리 킹즐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여성 선교사 메리 슬레서와 함께 갓 태어난 쌍둥이와 산모를 구출했다. 그 뒤 카누를 타고 지역의 강을 탐사하면서 아직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어종의 표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세 가지 물고기 종의 이름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처음 만난 인종과 어울리고 그들의 영역을 탐험하면서 해발 4천미터가 넘는 카메룬산에 어떤 유럽인도 가본 적이 없는 경로를 통해 오르기도 했다.

또다시 귀국하자 이번에는 언론이 더 소란스럽게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그 언론의 표현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그에게 “신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당시 그것은 세를 펼치기 시작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페미니스트가 들으면 경악할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참정권 운동이 사소한 문제였고, 더 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참정권이 없는 여성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업적에 더 큰 관심이 기울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런 태도를 취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와 빚은 마찰도 작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인들을 개종시킨다고 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타락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이 혐오하던 일부다처제에 대해서도 그것이 삶의 필요에서 나온 관행이었다고 옹호했다. 아내 한명을 빼고는 모두 버린 뒤 개종하라는 이야기는 다른 아내들과 자식들을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곤경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메리 킹즐리는 문화상대주의의 선구자였다.

그는 <서아프리카 여행>과 <서아프리카 연구>라는 책 두 권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얻고 학문의 세계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생생한 문체로도 정평 높은 그 책들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부친 조지 킹즐리가 돌아가시면서 완성하지 못한 위대한 책을 완결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의 유고는 연결되지 않는 파편에 불과했다. 반면 딸의 저작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선구가 되었다고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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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조한욱의 서양사람(史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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