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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4 17:00 수정 : 2019.10.25 02:35

조한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웬만한 세계사 개설서마다 제국 말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사실을 로마의 업적으로 꼽는다. 그 과정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균일하다. 즉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승인받고,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받아들여 다른 모든 이교를 금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에 전파된 이래 계속 세력을 확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삶에 위안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신의 의지가 섭리에 따라 전개된다는 교리를 펼치며 개인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소외되고 박탈된 계층에 호소함으로써 세력 기반을 획득했다. 그러나 황제들이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고 토지를 하사하면서 하층민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이제는 귀족과 황제의 종교가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과 도시 빈민들이 등을 돌림으로써 기독교는 저변의 지지 기반을 잃어 위기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구해준 사람들이 수도승들이었다.

수도승들은 본디 은자로서 완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를 떠났던 사람들이다. 사막으로 들어가 예수의 삶을 본떠 죽음까지 불사하며 완전히 자아를 버리는 기독교의 이상에 고취되었던 사람들이다. 고대 세계에서 사막은 악마들의 장소로서 문명과 절연된 곳이었다. 그들은 그런 곳에서 예수의 삶을 모방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입증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서 수도 생활을 택했던 것이다.

박해받던 시절 기독교도의 가장 고결한 종교적 삶은 죽음이었다. 사자의 먹이가 되더라도 순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수도승의 생활은 순교와 마찬가지였다.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수도승들은 물질적인 쾌락의 세계에서 자신을 죽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절, 청빈, 복종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평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기독교가 계속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수도승들에 대한 민중의 존경심 때문이었다.

참된 목회자와 신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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