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07 19:57
수정 : 2016.03.07 19:57
‘장황한 연설 등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라는 것이 필리버스터에 대한 사전의 설명이다. 그래서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만 8일, 192시간 동안 국회 본회의에서 쉬지 않고 진행된 야당 의원들의 테러방지법 반대 토론은 필리버스터가 아니다. 야당 의원들은 의사진행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국회법(106조의 2)에 따른 의사진행의 하나인,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토론(“무제한 토론”)’을 벌였을 뿐이다.
필리버스터에 익숙한 미국 의회에서는 의원들이 전화번호부나 성경을 읽으면서 발언 시간을 끌기도 한다. 토론보다도 의사진행 방해에 방점을 찍는 행동들이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 국회에서 벌어진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은 테러방지법의 표결 지연을 넘어, 이 법에 대한 실질적인 반대토론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의회의 필리버스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은 국회와 정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대다수 언론의 보도와 논평이 그려놓은 국회와 정치의 그림은 ‘반대만 하는 야당’, ‘일 안하는 국회의원’, ‘혐오스러운 정치’였다. 따로 인터넷을 뒤지면서, 정치인들이 어떤 쟁점을 놓고,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직접 살펴보지 않는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이 그려 보여주는 일그러진 정치의 모습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테러방지법안도 ‘조중동’으로 불리는 세 신문과 종편 채널, 그리고 지상파 방송을 비롯한 언론 대부분이 이 법안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않아 사람들은 야당이 왜 이를 한사코 반대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국회방송, 인터넷 방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을 직접 접한 사람들은 언론이 설명해주지 않은 테러방지법의 실체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언론이 정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테러방지법의 실체를 알게 된 국민들이 이 법의 위험성을 자각함으로써 여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27일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테러방지법 찬성이 64.5%로, 반대(22%) 의견의 3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제한 토론을 거쳐 국회의결까지 끝난 지난 2~3일 한국갤럽이 전국 성인 101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는 51%가 이 법에 대해 ‘일반인까지 사찰할 우려가 있으므로 반대’라고, 39%가 ‘테러 예방에 필요하므로 찬성’이라고 답해, 반대가 찬성을 12%포인트나 앞섰다.
대다수 언론은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이를 ‘필리버스터’라고 명명한 뒤 토론을 통해 드러나는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들은 토론의 내용보다는 ‘필리버스터’ 시간의 최장 기록을 누가 깼느냐를 두고, 경마 중계를 하듯이 보도하면서, ‘필리버스터’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에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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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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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이들의 ‘고객’인 독자와 시청자들은 이미 인터넷, 에스엔에스 등을 통해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었다. 만일 언론이 문제를 앞서서 제기하고, 이에 대한 활발한 사회적인 토론을 이끌었다면, 테러방지법이 이번처럼 수정 없이 의결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야당의원들의 무제한 토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부도덕하고 나태한 언론에 의해 촉발된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은 정치가 언론을 넘어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서는 길을 열어놓았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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