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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2 18:24 수정 : 2014.06.22 18:24

희정 기록노동자

‘학교 급식실 노동자가 뜨거운 물이 담긴 솥에 빠져 죽었다.’ 이런 소문을 들었다. 참혹한 죽음. 신문에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아는 기자에게 연락을 했다. “들은 적 있어?” 기자는 모른다고 했다.

“이상하다. 분명 사망 사건이라 했어.” “설마. 잘못 안 거 아니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죽은 일이 알려지지 않겠어.”

심지어 선거 기간이었다. 그런 죽음이 있었다면 출마한 후보들이 앞다투어 장례식장을 찾았을 것이라 했다.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애초에 사건이 없었다면 다행이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며칠 뒤, <한겨레>에서 급식실 노동자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잘못 알았다. 사람이 거대 솥에 빠져 죽은 사건은 없었다. 다만 초등학교 급식실 직원이 끓는 물에 빠져 전신 화상을 입고 투병 끝에 사망한 일이 있었다.

기사의 일부를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3월18일 설거지를 하려고 대야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 위로 넘어져 화상을 입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진 김씨는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호흡 곤란, 패혈증, 폐렴 등에 시달리다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났다.”

5명의 노동자가 740여명분의 식사를 만들어야 했다. 그 다섯이 일하기에도 좁은 급식실. 서로를 피해가며 분주히 움직이다가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놓은 대야에 빠졌다. 크게 화상을 입었다. 피부이식을 해야 했으나,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수술이었다. 막대한 돈이 드는 수술을 하고도 두 달을 꼬박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살림이 어땠으며, 그 고통이 어땠을까.

그럼에도 그이의 죽음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기자들도, 출마 후보들의 행렬도 없었다. 짧은 기사 몇 개만이 그의 죽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너무 조용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대야가 아닌 사람 하나 들어갈 커다란 솥에 빠져야 했다. 두 달 동안 죽음과 사투하는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래야 죽음이 주목받는다. 글로벌 기업에 맞서 백혈병같이 희귀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 번에 다섯도 죽고 여덟도 죽어야, 용광로에 빠지고 기차에 깔려 죽어야지만 그 죽음이 애처롭다고 알려진다.(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지만.) 그래야 죽음 밑에 깔린 부당함이 세상에 고개라도 내밀 수 있다.

학교 급식실 작업 환경은 노동·사회단체들한테 몇 차례나 지적을 받아왔다. 불도, 칼도, 뜨거운 증기도, 무쇠도 있는 곳에서 최저임금 받는(그 이상 지급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업체와 학교 ‘덕분’이다) 노동자들이 한 명당 200여명의 식사를 만든다. 사고가 나기 딱 좋은 환경은 몇 년째 바뀌지 않는다.

화상을 입으면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시다가 그 또한 시간에 쫓겨 그만둔다. 열이 화끈거려 잠 못 들고 뒤척이다 다음날 마지못해 약을 발라보지만, 손에 물 묻히지 않을 새 없는 노동에 약은 어느새 지워진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 그러다 한 노동자가 죽었다.

아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이 현실조차, 그이가 세상을 떠나 알려진 게다. 언제까지 노동자의 죽음에 기대어 작업 현장의 위험을 말할 것인가. 운 좋은 노동자가 살아남았다 해도, 지금 우리의 일터는 충분히 위태롭다.

너무도 조용히 죽어간 이의 명복을 빈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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