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9 18:39
수정 : 2014.06.2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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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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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혼자 앉아 글을 쓰고 있자니 사방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느낌. 조금은 편안하고 조금은 외롭다. 커서가 깜박이는 노트북을 응시하며 저 깜박임에 뭔가 답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노트북 자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절대 ‘혼자 앉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노트북, 누군가가 설계하고 디자인하고 생산한 것이다. 나는 또 누군가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있고, 조금 전에는 누군가가 기른 닭을 튀긴 치킨을 먹었고, 지금은 누군가가 만든 책상에 앉아 있고, 누군가가 만든 스탠드를 켜고 있다. 사람 하나 살아가는 데에 이 많은 것이 다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많은 관계들을 다 맺고 있다. <맹자> 등문공 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몸에 온갖 기술자들이 생산해낸 결과물들이 다 구비되어 있다.’(一人之身而百工之所爲備) 눈앞에 보이는 물건 너머를 생각한다면 나는 절대 혼자 있었던 적이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내 주변을 살펴보고 있자니 갑자기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져 오는 느낌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성장 자체가 ‘더불어 함께’이다. 인간은 태어나 무려 20년에 걸쳐 성장한다. 그 20년 동안 정말 많은 인적 지원과 물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게 20년씩이나 성장해서 어떤 어마어마한 존재가 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없어서 누구든 완벽하지 못한 부모님, 완벽하지 못한 선생님, 완벽하지 못한 친구들, 완벽하지 못한 어른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 입으며 그 시기를 견디듯 걷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평생 오롯이 품어내야만 한다. 게다가 정신과 감정의 섬세함은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것이 결정적 상처로 남을지 짐작할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그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상처 없이 키우는 방법도 만들어낼 수 없다니 이건 너무 가혹한 운명이 아닌가?
그러나 어쩌면 완전함을 기대하기 때문에 가혹함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계’ 그 자체로 시선을 돌리면 이것은 어쩌면 혹 멋진 가능성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절감한다면 상대방이 나와 다를 때 그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 내 안에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싹이 나를 존경해서 내게 절대적으로 기대 올 때 ‘나만을 배우고 내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혼자 설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나의 부족함을 보고 내게 질문할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상처 입은 누군가 내게 오거든 나와의 관계가 그에게 치료약이 되도록 나를 기꺼이 내어주되 그가 떠난다 해도 타인에 대한 마음의 빗장을 아예 닫아거는 일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20년이라는 긴 성장 시간이,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지만 결국 사람에게서 치유된다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시간이 된다면 세상은 함께 울고 함께 고통받으며 더불어 웃고 꿈꾸는 연대의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부모의 아이냐고, 어떤 집안의 아이냐고, 어떤 학교 출신이냐고 물으며 선 긋는 것은 무책임하다. 결국 그 어떤 아이든 ‘우리’의 아이들이다. 건강하지 않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건강한 세상을 만들 수 없고,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신뢰나 내일이 생길 순 없는 일이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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