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6 19:26
수정 : 2014.07.0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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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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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없고 ‘빽’도 없고 딱히 훌륭한 재주도 없었던 내가 20대를 통과하면서 얻은 것은, 아주 미세한 기척에도 반응하는 예민한 눈치였다. 세상에는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어른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지식과 돈, 혹은 그것에 대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오늘 기분은 어떤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심지어 아침에는 뭘 먹었을 테니 점심으로 무엇을 제안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그런데 참 신기했던 것은, 어른들은 나의 처지나 기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문제를 다룰 때는 그 명민함에 눈이 부실 지경인 어른들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만한 나의 감정을 읽지 못했다. 대신 내가 마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나 때는 힘들었는데 참 좋아졌다는, 들을 때마다 신경을 긁는 농담은 덤이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비대칭적인 상상의 구조가 출현한다고 지적한다. 힘이 없는 자는 힘 있는 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떠할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끊임없이 상상한다. 그래야만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 힘 있는 자는 힘이 없는 자의 처지를 상상하지 않는다. 굳이 그런 피곤한 정신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이런 상상력의 비대칭을 발견할 수 있다. 팀장님이 아리송한 말을 툭 던지면 부하 직원들이 함께 토론까지 해가며 그 말의 진의를 추측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요즘 정부 주요 보직에 후보자로 오르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분들의 놀랍도록 빈곤한 상상력과 어이없는 뻔뻔함이, 그들이 이제껏 누렸던 권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신을 1저자로 삼아 제자의 석사학위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한 김명수 후보자는, 주저자를 양보하는 학생의 심경을 헤아려본 적이 없거나, 적어도 깊게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마움’에 자신을 1저자로 올려준 것 같다는, 실소를 자아내는 해명을 내놓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낙마했지만,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일제 식민지로 견디기 힘든 피해를 입은 분들이 자신의 발언에 입게 될 상처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진의가 뭐였건 그것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분들은, 자신의 행동과 말에 맘 졸이는 사람들의 입장을 상상해 본 적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 없는 위치에 계셨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아마 과거의 행동과 발언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뭔가 찝찝함이 있었다면, 온 국민 앞에서 탈탈 털리는 청문회 대상 보직을 수락하기는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계속 실패하는 인사에 대통령님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다. 올리기만 하면 난리가 나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왜 이리 난리인지 생각해보셔야 한다. 살면서 사람들은 권력자들의 무감함과 뻔뻔함을, 거기서 파생하는 폭력을 수없이 경험한다. 그래서 적어도 고위 공직자들에게서는 그걸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당장 내 삶에 지장이 없더라도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상해보는 것. 그게 존경받는 리더의 자질 아닌가. 이 요구를 이해할 수 없고 마냥 짜증이 나신다면, 익숙한 권력의 자리가 대통령님의 상상력을 빈곤한 형태로 쪼그라뜨린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실 일이다.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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