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는 5월 단기방학을 실시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와 함께 여가를 즐기라는 취지. 그러나 환호는 적다. 맞벌이 부부들의 근심이 크다. 1인 노동소득으로 가족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사회다. 놀라고 만든 방학을 초등학생들은 학원이나 위탁시설에서 보내게 된다. 책상머리 정책이라는 평이 나온다. 혀를 차며 관련 소식을 접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단기방학의 대상인 초등학생들은 이 정책을 어떻게 여길까. 사람들은 말한다. “애들이 뭘 알겠어. 학교 안 가면 좋은 거지.” 그럴까. 적어도 반나절 많게는 12시간 넘게 학교에서 지내는 이들은 학생이다. 그런데 이들의 의사는 학교행정과 교육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 몇몇 교육청이 등교시간을 늦추는 정책을 결정할 때도, 학생들이 할 수 있던 의사표현은 등교시간 선호 설문조사에 답하는 것뿐이었다. 그조차 소수 학교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애들은 어리니까. 그런데 말이다, 세월호 침몰 과정을 취재해온 이가 해준 말이 있다. 세월호에 태워진 수백의 학생들에겐 자신이 탈 배를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고. 수학여행은 여러 주체들이 엮인 이권사업이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돈벌이의 객체였다. 학교와 업자들에게 객체들의 안전은 저당잡혔다. 마진과 커미션 욕심, 부조리한 관행이 이런 참사를 부른 것이라며 사람들이 눈물지을 때도 학생들은 여전히 불쌍한 아이들로 남았다. ‘어른’들에게 이들은 미숙의 존재이다. 정책이란 ‘주체’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 투표권 연령을 낮추는 문제도 공론화되지 않는다. 시장에서도 마찬가지. 월급날이 다가오면 사장은 부모 마음이 되어 어차피 유흥비로 쓸 돈 안 준다고 한다. 임금을 체불당한 알바노동자가 찾아가면 근로감독관은 묻는다. “학생 신분에 그 돈은 어디다 쓰려고?” 주된 참여자여도, 노동 행위자여도, 피해자여도 ‘아이’라는 신분으론 주체가 되긴 힘들다. 그런데 ‘아이’들만이 주체가 될 수 없는 게 아니다. ‘사원들이 복잡한 경영을 뭘 알아. 이건 우리 집안 대대로 만든 회사야.’ 노동자가 경영에 참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국민이 정책에 개입하면 안 되는 이유도 있다. 정치인과 행정관료와 전문가들이 따로 있다. 그들이, 그러니까 국가가 해결을 하겠다는데도 믿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욕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떼쓰기’라 부른다. 누군가는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미개한 국민. 이러한 몰이해는 그들 눈에 우리가 ‘주체’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시받고, 지시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대통령을 욕하고 거리에서 물대포를 맞고 청와대로 행진한다? 누군가들의 눈에는 비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비상식’에 동참한 사람들은 안다. ‘나’는 나의 작은 행동에 따라 수많은 인과와 영향과 나비의 날갯짓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의 주체이며, 이를 인정받기 위한 무수한 행위들을 한다. 그중 하나가 거리를 메우고 행진하는 일이다. 기꺼이 물대포도 맞는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진실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정책을 만든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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