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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1 18:57 수정 : 2015.08.04 17:44

황석영·신경숙 작가.

[2030 잠금해제] ‘분서’ 권하는 사회

책장에 바람 잘 날 없는 한 주다. 표절 혐의에 휩싸인 신경숙과 창비 출판사의 책들을 내다버리겠다는 아우성이 들끓는다. 해당 작가와 출판사의 다른 책들에 대한 지지까지 철회하는 게 정당한가 고민되지만, 결연한 다짐에 함축된 실망의 크기는 충분히 짐작된다.

오랫동안 내 문학수업의 한 축이었던 작가가 ‘표절’이라니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그에 대한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분노’다. 신경숙의 표절은 “긴급 대토론회”를 요하는 것이었으며, 순식간에 ‘순수문학의 오염’이자 ‘1990년대 문학의 타락’, 나아가 ‘한국문학의 몰락’으로 의미화됐다. 이 점층법의 논리를 목도하면서, 소설가 한 명이 이렇게나 많은 걸 상징하고 있었나 싶어 아찔해졌다. 개인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오히려 그를 희생자로 묘사하는 ‘마녀사냥’ 프레임을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곧이어 발표된 신경숙과 창비의 무책임한 변명, 악명 높은 ‘국익론’을 기어이 시전(?)한 한국소설가협회의 압도적인 뻔뻔함은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나는 사건을 제보한 이응준 작가의 글을 거듭 읽었는데 일단 내 독해력을 의심하며 묻노니, 그 글에 쓰인 “한국문단”과 “한국문학”, “한국문인”은 도대체 누군가. 그 글에서 저 세 주체는 신경숙과 동일시되거나, 침묵으로써 그녀와 공모한 대상이며, 신경숙을 단죄하여 “진정한 문학”에 대한 “순정”과 “고결함”을 수호할 “나”와 “미래의 문우들”이기도 하다. ‘신경숙’ 혹은 “나”와 “미래의 문우들”은 어떻게 ‘한국문학’과 ‘한국문학의 타자’를 동시에 상징할 수 있는 걸까.

신경숙의 표절을 성토하는 이들은 곧장 조경란, 천운영, 전여옥으로 소급되는 표절의 계보를 소환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비근한 예인 황석영의 <강남몽> 표절 사건은 가벼운 에피소드로만 치부됐으며, 내 기억으로도 당시 분노의 밀도는 이렇게 높지 않았다. 황석영이 아니라 신경숙에 이르러서야 한국 문학계를 파탄낸 장본인으로서 정치계와 경제계의 박근혜, 조현아와의 커플링이 가능했다는 점은 무엇을 뜻할까. “한국문학”은 모처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김에, 이 ‘비난의 대상에 대한 (무)의식적 성별화’에 깃든 욕망도 성찰해볼 일이다.

분서 욕망을 일으키는 사건이 또 있다. ‘진보논객’ 한윤형과 박가분(박원익)의 데이트폭력 혐의가 피해자로부터 직접 제보된 것이다. 그런 사례들은 숱하게 많아서, 현재 에스엔에스(SNS)에는 데이트폭력을 겪은 여성들의 고백이 줄을 잇고 있다. 제2의 ‘100인위’ 사건이 생긴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놀라운 것은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질문들이다. ‘오래전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냐’, ‘사적 보복의 목적이 있지 않냐’는 물음들. 신경숙의 고발자에게는 물어진 적 없는 질문들이다.

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한윤형과 박가분은 ‘짱돌을 들지 않는’ 88만원 세대에 대한 486세대의 소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차세대 이데올로그들이다. 이들은 여성영화제 패널로 참여할 만큼 페미니즘도 아주 ‘잘 배웠다’. 그렇다면 이 ‘진보 키드’들의 현재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바라건대, 신경숙의 경우가 그러했듯 작금의 사태도 ‘진보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무겁게 사유될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의 유력한 글쓰기 양식이 된 ‘사과문’ 작성의 ABC에 대해 “긴급” “대토론회”를 여시기를. 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알려왔습니다>

6월22일치 29면 ‘‘분서’ 권하는 사회’ 칼럼에 대해 박가분씨는 “여성영화제 패널로 참여한 바 없으며, 칼럼 필자가 (박씨의) 데이트 폭력이 사실임을 암묵적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박씨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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