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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3 18:44 수정 : 2015.08.23 18:44

드라마 이야기다. 주인공인 의사의 어머니가 큰 사고를 당한다. 구급차에 실려온 그녀를 두고 응급실 당직의사는 가망 없다며 사망선고를 내리려 한다. 들인 수고에 비해 살 가능성이 적다. 그런 판단을 한 데는 환자의 싸구려 옷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이 병원 의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급히 응급조치가 이뤄진다. 어머니는 목숨을 건진다. 안도도 잠시. 브이브이아이피(VVIP) 환자가 급박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오면서 의료진이 부족해지고, 결국 수술이 늦어진 어머니는 사망한다.

주인공은 일명 ‘사’자 직업을 가졌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의 사회적 지위가 되어 어머니의 생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이가 나타나자 의료진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다. 드라마다. 과장일 게다. 그러나 이건 분명하다. 이 사회는 목숨조차 불평등하다.

모 재벌 총수의 생명을 연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연장이 가능했던 이유는 명료하다. 돈. 그가 사들일 수 있는 고가의 의료기술과 인력. 그리고 4분이라는 골든타임을 보장해준 지리적 이점. 단순하게 말해, 대형병원이 자리한 부유한 주거지.

그 총수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이들도 아팠다. 이들의 병원 이송 과정에는 총수의 그것과는 또 다른 ‘스릴’이 있다. 강남 지역 자제가 19살에 반도체 공장에 들어갔을 리 없고, 이들 사는 곳은 빤했다. 3분 진료를 받기 위해 몇 시간을 도심을 향해 달린다. 차를 구할 수 없어 빌린 트럭에 실려오는 이도 있다. 대형병원에 도착하면 대기시간은 길고 병실은 부족하고, 로비 의자에 누워 몇 시간을 보낸다.

병원에 가면 사나? 맞벌이로도 빠듯한 임금 수준인데, 환자와 간병하는 이까지 일을 못한다. 가족 죽는 일만 남았다. 온전한 투병조차 사치이다. 이들은 병석에 누워 자신의 질병을 입증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과 병의 연관성을 찾아 직업병이라는 과학적 증거를 거대기업과 국가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대체 무엇을 바꿔야 저들의 수명이 갉아먹히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주인공 의사는 수명을 빼앗기지 않을 방안을 찾았다. 위로 올라가는 것. 악착같이 돈을 벌고 지위를 높인다. 돈은 재벌 총수가 있는 반도체 회사도 준다고 했다. 반도체 직업병을 인정받기 위해 피해자들이 10년을 싸운 결과, 마침내 삼성은 교섭 자리에 앉았다. 삼성의 책임을 묻는 권고안이 이달 초 조정위원회를 통해 나왔다. ‘기금 마련’과 ‘공익법인 설립’이 주된 내용이다. 삼성은 기금으로 1000억원을 내놓겠다고 했다. 1000억이라는 숫자에 대다수 언론의 눈이 쏠렸다.

공익법인은 불가하다는 삼성의 입장은 가려졌다. 공익법인 설립은 직업병에 대한 보상과 예방이 힘 있는 자들의 기준과 편리에 맞춰 처리되지 않도록, 사회적 차원의 해결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돈은 많은 것을 가린다.

희정 기록노동자
드라마 속 의사는 돈으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할 필요 없고, 의료진을 누구에게 뺏기지도 않고, 고급 의료장비를 가진 병원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지위. 그런 지위를 가진 무리에 속하고자 한다. 그런데 모두가 돈을 향해 달리면, 이 사회는 우리 모두를 브이아이피로 대접해줄 것인가. 총체적 난국인 엉킨 실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 풀지 않아도 우리의 수명은 정말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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