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13 18:53
수정 : 2015.12.14 14:34
화제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가르쳐준 것은 휘날리는 태극기와 ‘세계 4위’라는 국가적 성공담이 아니라, 피켓걸이 돼 티브이에 처음 출연한 한 소녀의 작은 해프닝으로 서울올림픽을 서사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대면해야 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라기보다 널리 각인된 그 사건의 서사와 이미지들인지도 모른다. 해당 사건에 대한 지배적 심상에 도전하는 것. 나는 그런 기대를 품고 토요일 오후, 영화 한 편을 보러 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
당신에게 2시간짜리 영화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야기를 짤 텐가. 생각해둔 첫 장면은 있는가. 아무리 ‘기록’ 영화라 해도 수많은 장면들을 선별하고 이어 붙이는 나름의 질서를 만드는 일은 또 하나의 해석이자 창조다. 누구의 관점에서 서술할지, 긴 사태의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할지, 폐회로티브이(CCTV)에 찍힌 아이들의 영상을 넣을지 뺄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라면 이런 수많은 선택들을 피할 수 없을 게다.
다른 기록재현물과 구분되는 <나쁜 나라>의 포인트는 ‘거리에서 싸우는 유가족’을 그린 데에 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가정방문 인터뷰를 통해 ‘서로 다른 유가족’의 모습을 묘사했다면, 이 영화는 세월호특별법 제정까지 전개된 유가족들의 싸움을 재현한다. 이 영화에는 파란 선미만 남은 배의 모습도, 지상파 뉴스의 유명한 오보 자막도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유가족이며, 그들은 주로 거리에 머물고,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다. 안산과 진도, 여의도, 광화문,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길을 그들은 계속해서 걷거나 눕는다. 은박돗자리와 비닐천막, 그리고 노란 우산이 이 영화의 핵심 오브제인 것이다.
그리고 기묘한 장면이 있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선 남자와 여자가 한 화면에 잡힌 장면. 아무 배경음도 없이 카메라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오래 응시한다. 비로소 관객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 화난 것도 체념한 것도 아닌 그 형언할 수 없는 표정들을 읽어보라는 카메라의 요구를 깨닫는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울음소리. 카메라가 비추는 두 사람의 것은 아니다. 잠시 시야를 가리는 하얀 물체가 등장하고, 곧이어 한 남자가 다가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여자를 다독이는 장면이 풍경처럼 나온다. 우는 여자의 얼굴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고, 그러므로 응시나 해석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 누구도 가닿지 못하는 “울음의 왕국”(정현종)에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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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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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의 투쟁, 그리고 문득문득 등장하는 해석불가의 정적과 울음. 이게 <나쁜 나라>가 제시하는 ‘잊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이 선택을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걸 확인할 방법은 오직 영화를 보는 것뿐이다. 단지 이 영화가 정의로운 주제를 택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사유가 멈추고 이어나간 지점이 어딘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 연말은, 어제 일도 까먹는 현대인이 올해 초 유행한 노래들마저 새록새록 되짚을 만큼 비상한 기억력이 발휘되는 드문 시간이 아닌가.
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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