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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10 19:38 수정 : 2016.04.10 19:38

총선이 코앞이다. 훗날 역사에 이번 선거는 어떻게 기록될까. ‘가족정치, 아재정치, 읍소정치’ 같은 명명에서 보듯, 이번 선거에서 시민의 복지, 공동체의 발전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논의가 희미했다. ‘옥새투쟁’이나 ‘윤절’(4년마다 돌아오는 새누리당의 ‘큰절’) 같은 해프닝들이 콩트의 한 장면처럼 씁쓸하게 기억될 뿐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여성의 정체성을 ‘섹스어필한 화장품 소비자’로 고정시킨 선관위의 투표 홍보 영상, “치마와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는 국민의당 행사 사회자의 발언, 정의당이 선정한 ‘중식이밴드’의 여성 혐오적 테마송 논란 등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폭넓게 펼쳐진 여성 혐오 양상이다. 이 문제는 단지 여성 혐오를 대중적인 선거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했다는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책과 후보의 부재(또는 비가시화), 남성으로 상정된 ‘표준시민’ 혹은 ‘유권자’의 상과 긴밀히 관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대의제에서 다차원적으로 행해지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배제에 공모한다. 2차대전 참전 소녀병사들의 증언을 기록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2016년 한국에서 ‘선거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현실은 ‘여성대통령’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를 뼈아프게 학습해야 했던 이 나라에서 이미 예고된 ‘재앙’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선거는 ‘여성과 민주주의’라는 도전적 명제를 사유하고 실험할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계기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퇴행적인 현실에 붙들려 소진해버려도 좋을까? 선거 정국의 수많은 여성 혐오 사례들은 가히 수공업에 가까운 모니터링과 지속적인 계도·교정을 요하는데, 이는 마치 ‘여성과 정치’에 대한 급진적 기획을 저지하려는 거대한 음모 같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대의제와 소수자 정치’ 같은 의제들에 대한 축적된 사유를 더욱 진전시키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남녀동수제’ 논의는 시사적이다. ‘대표자의 성비를 50 대 50으로 선출’하자는 이 논의는 남녀의 해부학적 이원성을 공화주의적 대의제가 전제하는 ‘추상적 개인’의 기본값으로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는 그간 ‘중성’(사실상 ‘남성’)으로 상징화된 ‘인간’을 성적 특징을 지닌 ‘두 존재’로 조정함으로써 외려 정치적 영역에서 성차가 탈상징화되는 효과를 노린 역설적 전략이다. 물론 이 논의는 일부 논자들에 의해 동성애 혐오 정당화 논리로 왜곡되거나, ‘할당제’ 혹은 ‘반차별법’과 혼동되기도 했다.

오혜진 문화연구자
그러나 남녀동수제의 의의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경계하고, ‘엘지비티’(LGBT,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성정치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 정치’와 구분되는 성차의 정치학을 발명하고자 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을 ‘보편적 개인’으로 등록시킴으로써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잠재적 가치를 최대화하려 한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여성과 정치의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점이다. ‘여성과 민주주의’라는 과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으나 달성 불가능한 것도 아닌 채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혜진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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