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7.03 17:50 수정 : 2016.07.03 19:06

오혜진
문화연구자

한낮의 국립중앙도서관 이용자의 대다수는 60대 남성이다. 현저히 낮았던 여성 고등교육률과 경직된 성역할을 고려하더라도, 공적인 지식·문화의 장에서 할머니들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녀들은 채 해소되지 않은 젊은 날의 지적 열정과 문화적 호기심을 어떻게 충족시키고 있을까. 이 질문은 ‘내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은 훗날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아직 덜 살아봤지만 중간점검을 해보자면, 이 나라에서 ‘젊은 여성’으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각종 성매매사건이나 유명인사의 연애스캔들에서 젊은 여성들이 당연한 듯 성욕의 대상, 유흥의 도구, ‘꽃뱀’이나 가정파괴범으로 간주되는 걸 보니 확실해진다. 여성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굳건한 자의식을 지닌다 해도 여전히 ‘성적 존재’로 남는다는 것.

기실 포스트페미니즘 세대인 현재 20~30대 여성들의 자기의식은 분열적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남녀평등의 가치를 배웠으며, 고등교육률과 학업성취도는 남성의 그것에 육박하거나 상회한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적·사회적 성취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의 결과로 손쉽게 매도되는가 하면, 이 모든 상황을 성찰하며 비대해지는 자의식마저 부르주아 엘리티즘의 산물로 의심된다. 이 사회는 ‘멋진 여성’이 아니라 그저 ‘나은 인간’이 되려는 여성들의 소박한 열망마저도 허상 혹은 사치로 만든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자존감의 하강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종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내게 무한한 용기를 준 드문 텍스트다. 이 드라마는 비혼, 이혼, 사별 등의 이유로 ‘혼자 사는 여자들의 노년’을 다룬다. 수십년간 남편의 핍박을 견디던 ‘정아’(나문희 분)가 집을 나와 밥상을 뒤엎는 장면은 자꾸 봐도 안 질린다. 나는 이 장면을 전혜린과 흑맥주를 좋아하고, 노브라에 청바지 차림으로 세계여행 하는 걸 꿈꾸던 여자의 젊은 시절 지적?문화적 열정이 휘발되지 않고, 결국 어떻게 삶을 바꿔내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드라마의 여자들이 시종일관 “길 위에서” 죽겠다고 다짐한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 ‘혼자 사는 여자의 삶’을 ‘실패’한 것으로 낙인찍는 장치인 ‘객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이 서사는 신여성 나혜석, <별들의 고향>의 ‘경아’, 그리고 ‘맥도날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불운한 죽음’으로 운위된 ‘여성 행려병자의 계보’를 전복한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델마와 루이스>에서 벼랑 위를 나는 자동차의 이미지를 간직한 이 여자들은 적어도 ‘단독자’로서 삶과 죽음을 맞이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훌륭했던 것은 ‘개인의 성찰’을 유일한 답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희자’(김혜자 분)가 “혼자 살 수 있어. 혼자 할 수 있고”라고 우길 때, “혼자 살 수 있었고, 혼자 할 수 있었어. 인제는 아니고”라고 말해주는 친구의 존재는 우리가 이 삶을 좀 더 계속해나가도 된다는 신호 같다. 혼자 모든 고통을 짊어지거나 뭔가 잘못 판단하는 날이 오면, 나를 지켜봐준 친구들이 말해줄 테니까. “지금은 아니”라고. 그래서 내게 노년의 여성들을 다룬 이 드라마는, 지금 여기 혐오의 시대를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열렬한 응원 같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2030 리스펙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