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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10 23:44 수정 : 2016.07.15 09:51

홍승희
예술가

네팔의 파슈파티 강가 화장터. 희뿌연 연기 옆에 앉아 눈물을 흐르게 둔다. 비가 오면 머리를 젖게 둔다. 맨발로 빗물을 밟는다. 강물에 손을 담근다.

언제부턴가 눈물은 성급히 닦아야 할 것이 됐다. 우는 성질. 감성적이고 촉촉하고 느리고 내려가고 어두운, 음의 기운의 성질은 여성의 것으로 비유된다. 그것들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으로 취급된다. 여행과 예술이 그렇듯. 여행은 젊은 시절의 경험이고, 예술은 액자 속의 이상이다. 아름답지만 현실은 아니다. 현실은 끊임없는 경쟁의 일상이고 합리적인 실용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상상하는 대로 사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고, 공감하는 발걸음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 된다.

두 달 전 한국에서 인도, 인도에서 네팔로 왔다. 며칠 후 인도로 돌아간다. 한 달 여행을 생각하고 한국을 떠났지만, 아직 한국에 돌아갈 계획은 없다. 대통령 풍자 그라피티 건, 거리 퍼포먼스 일반교통방해 건, 집시법 위반 등으로 검찰 조사, 벌금, 재판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두렵지 않지만 피곤하다. 눈물을 다그치는 한국의 공기가 숨막혔다. 숨쉬기 위해 걸어왔다. 누군가는 헬조선 탈출을 축하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현실로 돌아오라고 한다. 탈출도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니다. 오늘이 삶의 공간이고, 현실이다.

이곳도 장마철이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장마는 반갑다. 울어야 하는 사람에게 빗방울은 고맙다. ‘더러운’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소똥도 어울려 걷는 이곳은 눈물도 빗물도 자유롭다. 화장터에서 매일 죽음을 목격하며 명확한 현실을 만난다. 실용의 현실이 아니라, 실존의 현실을. 힌두교의 시바신앙은 눈물을 다그치지 않는다. 죽음도 순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불확실한 삶과 축축한 어둠을 끌어안는다. 페미니즘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다. 모호하고 우울한 것들을 허용하는, 음의 기운 가득한 사상이다. 사회에도 음과 양의 기운이 있다면, 한국 사회는 음의 기운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건설과 미래와 개발만 있어왔다. 슬픔은 건설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까. 눈물은 약자의 투정이나 배부른 청승 취급을 받는다. 더 많은 눈물이 몸 밖으로 나와 세상을 적셔야 한다. 혼자 곪아온 눈물이 얼마나 많은가.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으로 탈락된 가치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상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하자는 게 아니라, 모든 눈물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눈물은 무능이 아니라 열린 감각의 증거다. 상상과 공감, 연약함과 모호함, 어둠과 촉촉함, 방랑과 혼돈, 절망과 우울을 숨쉬게 두라.

나는 오늘도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도 종종 울 것이다. 울면 뭐 어떤가. 아프면 뭐 어떤가. 아파도 되고, 울어도 된다. 병들고 늙고 약한 것을 고치고 개발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의 온전함을 아는 인문정신이 필요하다. 왜 눈물을 다그치는가. 왜 슬픔을 입막음하는가. 왜 꼭 뭘 해야 하는가. 왜 삶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가.

파슈파티 강에서 사람들이 목욕을 한다. 쓰레기와 잿더미로 혼탁하지만, 강물은 더럽지 않다. 여전히 강물은 햇빛에 반짝인다. 하늘을 비추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아무리 혼탁해도 물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생명의 존엄도 마찬가지다. 사실 세상에는 더러운 것이 없다. 눈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결국 진실과 만난다. 그러니 눈물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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