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7.31 17:48 수정 : 2016.07.31 21:18

오혜진
문화연구자

‘영어 쓰는 나라에서 태어날걸!’ 외국 오면 흔히 하는 생각이다. 언어장벽에 막혀 내 세련된 교양을 과시할 수 없다니 서럽다. 물론 뜻밖의 순간도 있다. 내가 한국어를 말할 때, 이곳 사람들은 낯선 언어의 출현에 놀랄 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반도 안팎에서만 쓰이는 한국어의 효용이 발생하는 것은 이때다. 나만 이해하는 언어로 이곳 문물을 평할 권리가 내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맛없는 음식이나 인종차별에 대해 한국어로 불평할 때, 나는 알지 못할 말로 떠드는 ‘우리’를 생경하게 쳐다보는 이곳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즐겼다. 지배언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소수언어가 갖는 해방감을 맘껏 누렸다.

허나 좀 우습다.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언어가 있다’는 데 안도하며, 한순간 내가 이 언어위계에 기입된 권력관계를 뒤집었다고 믿은 것은. 소수언어가 해방과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비주류 언어로 배치되는 구조에서만 가능하지 않은가. 식민지의 작가 염상섭이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 피지배자의 언어전략이 지닌 딜레마였다.

<만세전>에서 왜 단발하지 않느냐고 묻는 일본 유학생 이인화의 말에 갓장수는 답한다. “머리만 깎고 내지인 사람을 만나도 대답 하나 똑똑히 못하면 관청에 가서든지 순사를 만나서든지 더 귀찮은 때가 많지요. 이렇게 망건을 쓰고 있으면 ‘요보’라고 해서 좀 잘 못하는 게 있어도 웬만한 것은 용서를 해주니까. (…) 노형네들은 내지어나 능통하시지요?” 애초에 제국의 질서에서 배제된 ‘비국민’으로 분류되면 순간의 차별은 받을지언정 살기는 더 편하다는 것. 그런 면에서 갓장수의 조선어는 ‘굴종의 언어’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갓장수에게 갓을 쓰고 조선어를 고수하는 일은 일본인의 개입을 허락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그렇게라도 식민자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피식민자들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것. 실제로 제국 일본은 조선의 항거나 봉기를 자주 ‘소요’라 불렀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민족의 말이기 때문에 시끄럽고’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국문학자 이혜령은 이를 지배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고수하는 일이 피지배자에게 유일한 방패막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했다.

티셔츠 한 장을 계기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또 화제다. 성평등은 지지하지만 메갈리아에는 동조할 수 없단 게 진보진영의 ‘최선’인 듯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의 언어이므로 ‘일베’의 언어와 같으며, 그래서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없단다.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소환해 폭력을 일삼는 일베의 혐오와, 거울을 들어 그것의 폭력성을 보여주려는 메갈리아의 전략을 동궤에 놓을 수 있다니 놀랍다. 소수자의 언어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 소수자가 싸우는 대상의 혐의를 소수자에게 되씌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행해지는 무언의 폭력 아닌가.

물론 식민지 조선인들의 언어전략과 ‘미러링’의 메커니즘은 같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험에 드는 것은 늘 소수자의 언어라는 점이다. 소수자의 언어는 언제든 혐오의 언어라서, 굴종의 언어라서, 쾌락의 언어라서 ‘진정한’ 저항의 반열에서 탈락한다. 그러나 저항의 자원과 양식을 선별하는 것은 누구인가. 메갈리아는 ‘남성’이 아니라, 소수자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무지, 그 무지의 자격과 싸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2030 리스펙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