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그들은 책을 읽되 꼬집고 헐뜯기 위한 입과 시샘에 가득 찬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사소한 성차별적인 발언이나마 없는지 주도면밀하게 살핀다.”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저자 리타 펠스키가 적어둔, 페미니스트 비평가에 대한 통념적 묘사다. 당연히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최근 논의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떠올랐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의도된’ 무지와 혐오다.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라는 논제가 불편한 이들은 ‘내 작품이 여성혐오일 리 없어!’보다 더 참신한(?) 반론을 준비했다. ‘여성비평가들은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거나,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논하는 일은 한국문학의 상징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한국문학사를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는 반박이다. 이들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엄마’나 ‘누이’가 나오는 작품을 무조건 ‘여성의 낭만화’로 간주하고, 여성에 대한 멸시·폭력 장면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이를 ‘여성혐오’라 규정한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복잡미묘한 작품을 아주 단순하고 규범적인 메시지로 환원시키는 ‘예술 알못’(예술은 알지도 못하는)들이며, 여성혐오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의 자유’ 문제로 교묘히 치환된다. 하지만 단언컨대 어떤 페미니스트 비평가도 그런 식으로 비평하지 않는다. 그간의 여성주의 비평사가 증명하듯, 한국문학(사)의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돼왔다. 왜 근대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고 규정됐는지, <무진기행>의 ‘윤희중’이라는 남자는 ‘자기가 된다는 것의 비굴함’을 깨닫기 위해 왜 반드시 여러 여성들의 전형화를 거쳐야 했는지, <분지>의 반미주의는 왜 꼭 미국 대통령도, 미군도 아닌, 미군의 부인을 강간하는 방식으로 표출돼야 했는지, 못 쓴 소설은 왜 꼭 ‘소녀 취향’이라고 이야기되며, 1990년대 문학사는 왜 ‘여성성’ 혹은 ‘내면성’의 문학으로 정의되는지, 그리고 그건 또 왜 ‘아저씨 독자’들이 떠난 이유가 되는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질문은 이렇게나 많다. 결국 페미니즘 비평이 원하는 것은 특정 작가와 작품을 ‘여성혐오’로 낙인찍는 게 아니라, 여성혐오에 대해 더 많이 더 깊이 사유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성차별주의라거나 여성혐오증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끝장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비평은 여성혐오적 작품을 한국문학사에서 영원히 축출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어느 역사가가 박정희·전두환의 독재가 싫다 하여 그들을 역사에서 지우자고 했나? 페미니즘 비평이 하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미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구성돼온 역사적 방식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앞으로 한국문학이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과 쾌락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타진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한심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여성혐오 없이 작동하지 않는 당신의 낡고 무딘 미적 감수성부터 걱정하시라. 그럼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비평의 ‘본질적 한계’를 논하고 싶은 분께는 이 말을 전해드린다. “특정 사상을 주장하는 학파와 설득력 있는 논쟁을 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하가 아니라 최고의 저술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페미니즘 비평과 ‘예술 알못’ / 오혜진 |
문화연구자 “그들은 책을 읽되 꼬집고 헐뜯기 위한 입과 시샘에 가득 찬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사소한 성차별적인 발언이나마 없는지 주도면밀하게 살핀다.”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저자 리타 펠스키가 적어둔, 페미니스트 비평가에 대한 통념적 묘사다. 당연히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최근 논의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떠올랐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난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의도된’ 무지와 혐오다.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라는 논제가 불편한 이들은 ‘내 작품이 여성혐오일 리 없어!’보다 더 참신한(?) 반론을 준비했다. ‘여성비평가들은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거나,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논하는 일은 한국문학의 상징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한국문학사를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는 반박이다. 이들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엄마’나 ‘누이’가 나오는 작품을 무조건 ‘여성의 낭만화’로 간주하고, 여성에 대한 멸시·폭력 장면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이를 ‘여성혐오’라 규정한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복잡미묘한 작품을 아주 단순하고 규범적인 메시지로 환원시키는 ‘예술 알못’(예술은 알지도 못하는)들이며, 여성혐오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의 자유’ 문제로 교묘히 치환된다. 하지만 단언컨대 어떤 페미니스트 비평가도 그런 식으로 비평하지 않는다. 그간의 여성주의 비평사가 증명하듯, 한국문학(사)의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돼왔다. 왜 근대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고 규정됐는지, <무진기행>의 ‘윤희중’이라는 남자는 ‘자기가 된다는 것의 비굴함’을 깨닫기 위해 왜 반드시 여러 여성들의 전형화를 거쳐야 했는지, <분지>의 반미주의는 왜 꼭 미국 대통령도, 미군도 아닌, 미군의 부인을 강간하는 방식으로 표출돼야 했는지, 못 쓴 소설은 왜 꼭 ‘소녀 취향’이라고 이야기되며, 1990년대 문학사는 왜 ‘여성성’ 혹은 ‘내면성’의 문학으로 정의되는지, 그리고 그건 또 왜 ‘아저씨 독자’들이 떠난 이유가 되는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질문은 이렇게나 많다. 결국 페미니즘 비평이 원하는 것은 특정 작가와 작품을 ‘여성혐오’로 낙인찍는 게 아니라, 여성혐오에 대해 더 많이 더 깊이 사유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성차별주의라거나 여성혐오증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끝장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비평은 여성혐오적 작품을 한국문학사에서 영원히 축출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어느 역사가가 박정희·전두환의 독재가 싫다 하여 그들을 역사에서 지우자고 했나? 페미니즘 비평이 하는 일은 한국문학사의 미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구성돼온 역사적 방식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앞으로 한국문학이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과 쾌락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타진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한심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여성혐오 없이 작동하지 않는 당신의 낡고 무딘 미적 감수성부터 걱정하시라. 그럼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비평의 ‘본질적 한계’를 논하고 싶은 분께는 이 말을 전해드린다. “특정 사상을 주장하는 학파와 설득력 있는 논쟁을 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하가 아니라 최고의 저술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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