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며칠 새 트위터가 아수라장이 됐다. 급속도로 퍼진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 때문이다. 문학·영화·미술·만화 등의 예술계는 물론, 대학·군대·가족 내 성폭력까지를 고백·고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이어지고 있다. 고구마 줄기처럼 끝도 없이 폭로·전시되는 각계 성폭력의 스펙터클을 보고 있자니, 진정 쓴웃음이 나온다.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지 마’라는 변명은 얼마나 알량했던가.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시민권을 주장하던 페미니즘이 가장 긴급하게 폭발력을 갖게 된 주제가 결국 ‘성폭력’이라니, 이게 바로 ‘선진국’이라는 한국의 현주소다.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이 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강간문화’다.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강간이 만연한 환경”을 ‘강간문화’라고 명명하며, 이는 “여성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 지속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재 꼬리를 무는 성폭력 고발이 보여주는 것은 성폭력이 파렴치한 특정 개인의 예외적 행위가 아니라, 해당 분야의 권력관계를 유지?작동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로서 주변인들의 묵인·방조·가십화를 통해 지속·확산돼왔다는 점이다. 이 어둠을 드러내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다. 그 이유가 뭔지, 그리고 그걸 기꺼이 해낸 이 극적인 ‘용기의 폭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두고두고 새겨볼 일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통쾌하면서도 조금 두렵다. ‘고발-심문-색출-반성’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에 대한 가시화는 그간 수많은 여성들이 각종 억압과 트라우마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가능했다. 이것은 더 이상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피해자를 ‘피해자화’하지만은 않겠다는 발화자와 청자들의 의지, 그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사회에서 그런 결심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는 어투로 “미안해요~”라며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말아달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앞으로 발매할 시집의 출간을 취소하겠다는 분도 있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시집을 발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그에게 무슨 타격을 주며, 피해를 고발한 여성들에게 무슨 보상이 되나. 어차피 그 시집은 아무 일 없이 세상에 나왔어도 안 팔렸다. 이건 그들에게 ‘사과했다’는 도덕적 알리바이만 남길 뿐이다.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이권이나 지위를 포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 ‘영혼 없는’ 트위터-사과문 한 장을 얻으려고, 여성들이 ‘온 존재’를 걸고 말하기를 감행했던가. 고백의 값이 너무 싸다. 물론 가해자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발화자들이 작은 ‘승리’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폭로·고발의 형식은 여성의 성경험을 폭력·억압·피해의 방식으로만 말하게 한다는 맹점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사회정화’의 언어가 아니라, 여성 자신을 위한 ‘해방의 언어’가 되는 것, 우리가 기다리는 건 바로 그 장면이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고백의 값이 너무 싸다 / 오혜진 |
문화연구자 며칠 새 트위터가 아수라장이 됐다. 급속도로 퍼진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 때문이다. 문학·영화·미술·만화 등의 예술계는 물론, 대학·군대·가족 내 성폭력까지를 고백·고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이어지고 있다. 고구마 줄기처럼 끝도 없이 폭로·전시되는 각계 성폭력의 스펙터클을 보고 있자니, 진정 쓴웃음이 나온다.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지 마’라는 변명은 얼마나 알량했던가.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시민권을 주장하던 페미니즘이 가장 긴급하게 폭발력을 갖게 된 주제가 결국 ‘성폭력’이라니, 이게 바로 ‘선진국’이라는 한국의 현주소다.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이 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강간문화’다.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강간이 만연한 환경”을 ‘강간문화’라고 명명하며, 이는 “여성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 지속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재 꼬리를 무는 성폭력 고발이 보여주는 것은 성폭력이 파렴치한 특정 개인의 예외적 행위가 아니라, 해당 분야의 권력관계를 유지?작동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로서 주변인들의 묵인·방조·가십화를 통해 지속·확산돼왔다는 점이다. 이 어둠을 드러내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다. 그 이유가 뭔지, 그리고 그걸 기꺼이 해낸 이 극적인 ‘용기의 폭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두고두고 새겨볼 일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통쾌하면서도 조금 두렵다. ‘고발-심문-색출-반성’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에 대한 가시화는 그간 수많은 여성들이 각종 억압과 트라우마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가능했다. 이것은 더 이상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피해자를 ‘피해자화’하지만은 않겠다는 발화자와 청자들의 의지, 그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사회에서 그런 결심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응은 어떤가.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는 어투로 “미안해요~”라며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말아달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앞으로 발매할 시집의 출간을 취소하겠다는 분도 있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시집을 발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그에게 무슨 타격을 주며, 피해를 고발한 여성들에게 무슨 보상이 되나. 어차피 그 시집은 아무 일 없이 세상에 나왔어도 안 팔렸다. 이건 그들에게 ‘사과했다’는 도덕적 알리바이만 남길 뿐이다.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이권이나 지위를 포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 ‘영혼 없는’ 트위터-사과문 한 장을 얻으려고, 여성들이 ‘온 존재’를 걸고 말하기를 감행했던가. 고백의 값이 너무 싸다. 물론 가해자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발화자들이 작은 ‘승리’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폭로·고발의 형식은 여성의 성경험을 폭력·억압·피해의 방식으로만 말하게 한다는 맹점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사회정화’의 언어가 아니라, 여성 자신을 위한 ‘해방의 언어’가 되는 것, 우리가 기다리는 건 바로 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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