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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조용한 아침의 나라 / 박정훈

등록 2016-11-13 17:23수정 2016-11-13 20:18

박정훈
알바노조 위원장

토요일 밤 광장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학교로 직장으로 바쁘게 발을 옮긴다. 닫힌 셔터 문을 올리고,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전날의 함성 때문인지 아침이 더욱 조용하다. 당당했던 우리의 목소리는 침묵으로 바뀌고 열었던 입은 다시 꾹 다물었다.

대통령에게 퇴진하라 외치는 것은 쉬우나, 사장에게 퇴진하라 외치기는 어렵다. 광장에 서는 것은 즐겁지만, 편의점 계산대 앞에 서 있기는 힘들다. 오늘도 손님이 던지는 동전을 주섬주섬 줍고, 매니저의 욕설과 반말에 조각난 내 마음을 추스른다. 사장님에게 근로계약서를 쓰자는 말을 꺼낼지 말지, 임금을 주지 않는 사장에게 어떻게 연락을 하면 건방지지 않게 보일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운다.

87년 이후 30년 동안 똑같은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오늘 민주주의가 후퇴하였으니 민주주의를 지키고 회복하자 한다. 그러나 애초에 지킬 것이 없는 사람들, 돌아가고 싶은 행복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캐셔 노동자가 앉아서 계산하는 것, 콜센터 상담원이 욕하는 고객의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것, 하급 직원이 상사의 성희롱을 불편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일하다 다치면 산업재해를 받고, 주휴수당을 안 주면 당당히 신고를 하며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주의다. 그러니 지킬 민주주의도 없다.

이게 나라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장애인들이 버스 계단을 에베레스트 산처럼 느끼지 않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사랑 얘기로 수다를 떨며 밤을 새우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지 않는 나라에 살아본 적이 없다. 무당이, ‘호빠’ 출신이, 부모 없는 사람의 딸이 권력의 힘이나 커넥션이 아니라 공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고위공직자가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재벌들이 소위 ‘삥’ 뜯겼다며 민주주의가 훼손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 연봉이 약 150억원, 이건희 주식 배당금만 약 1800억원. 최순실에게 건넨 뇌물은 푼돈이다. 그 대가로 받은 선물이 노동개혁이고 자유무역협정(FTA)이며 총수들의 특별사면이지만 화가 나는 것은 따로 있다. 고작 뇌물로 사용된 이 돈들은 노동자들이 피땀이다. 이 돈이 노동자들에게 갔다면, 3차 하청 노동자들이 값싼 메탄올 때문에 시력을 잃는 일을 막을 수 있었고, 76명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백혈병이 걸려 사망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고, 삼성 서비스 노동자들이 실외기를 고치다 추락해 사망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지난밤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벌써 그립다. 어젯밤 꽉 찬 광장에서 맛본 해방감과 오늘 아침 꽉 찬 지하철에서 느끼는 모욕감 사이에서 자괴감을 느낀다. 최순실이 죽을죄를 지었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검찰에 쫓기듯 들어가는 모습과 우병우의 당당한 팔짱이 교차될 때 소름이 돋는다. 부모 잘 만난 정유라가 규칙을 어기고 대학 입학과 금메달을 따는 것에 분노하면서, 애초에 경기장에 입장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광장에 섰나. 퇴진시켜야 하는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우리 삶 속 민주주의의 광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우리의 아침을 깨우는 민주주의가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민주주의는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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