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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11 20:22 수정 : 2017.06.11 20:25

오혜진
문화연구자

며칠 전, “문학시장 거장”(‘문학+시장’의 “거장”이라니!)으로 알려진 작가 김훈의 인터뷰가 화제였다. 그는 그의 소설 일부가 여성의 몸에 대한 무지와 사물화 욕망을 드러낸다는 독자들의 비판에 이렇게 답했다. “여자가 나오면 쓸 수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요.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나는 매우 서툴러요. (…) 여자에 대한 편견이나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 고백은 새삼스럽지 않다. “페미니즘은 못된 사조”라고 말했던 17년 전에 비하면 차라리 겸손해 보인다. 소설가가 ‘아는 것’만 써야 하는 건 아니며 여성도 여성의 몸에 대해 모를 수 있으니, 그가 여성에 대해 잘 아는지 아닌지도 관심 없다. 다만, 직업이 소설가임에도 특정 대상 묘사에 대한 무능과 포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저 당당한 직무유기에는 놀란다. 곱셈은 잘 가르치지만 나눗셈은 못 가르친다는 수학선생을 상상할 수 있겠나.

김훈 소설이라면, 나는 늘 ‘냄새로만 존재하는 여자들’을 떠올린다. ‘가랑이의 젓국 냄새’로 기억되는 <칼의 노래>의 ‘여진’, 각종 몸냄새?젖냄새로 묘사된 <공터에서>의 여자들. 심지어 세월호 3주기를 기념해 쓴 글에서조차 동거차도의 미역국에서 “젊은 어머니의 몸냄새”를 맡던 그다. ‘후각적 본능에 의지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 개’야말로 ‘비루해서 숭고한’ 그의 남성 페르소나들이다.

<공터에서>의 여성들은 섹스 대상이었다가, 아기에게 젖 먹이다가, “다리통증”과 “치매”로 상징되는 육체적?정신적 불구가 돼 무수한 역사적 상흔을 각인한 ‘나무토막’처럼 변한다. 그녀들은 결국 어떤 ‘나아감’의 시간성도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와 그 자신의 ‘원시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죽는다. 반면, 이처럼 여성을 ‘피, 땀, 젖’ 같은 ‘비체’로 환원시킨 남성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섹스해서 날 낳았다는 걸 나는 믿을 수가 없어. (…) 난 무성생식으로 태어난 것 같아.”

여성인물들이 어떤 계보도 없이 나타났다 휘발되는 ‘냄새’로 남을 동안, ‘마장세(馬長世), 마차세(馬次世)’라는 이름의 남성인물들은 아비-장남-차남 계보를 켜켜이 쌓으며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김훈의 주인공은 언제나 ‘오지 않는 아버지’와 “니가 힘들겠구나”라는 말만 남긴 채 가장의 임무를 방기한 장남 때문에 모든 짐을 떠맡고 “아버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차남’들이었다. 한국문학은 아주 오랫동안 이런 걸 “20세기 한국현대사를 살아낸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비애로운 삶”이라고 불러왔다.(상기하자면, 김훈은 거대담론의 기만성을 파헤치고 ‘개별적인 것의 진실’을 내세움으로써 한국문학의 역사인식을 진일보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냄새’는 ‘개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문제는 김훈 소설의 노골적인 성(기) 묘사도, 김훈 자체도 아니다. 김훈이 너무 ‘늙은’ 소설가인 것도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비애로운 삶’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계보는 유구하다. 여자들이 소거된 “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를 꿈꾸며,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천명관)라고 외치고픈 것은 여전히 가장 ‘문학적인’ 욕망이다. 김훈의 저 인터뷰도 <남한산성> 100쇄를 기념하는 ‘영광된’ 자리에서 나왔다. 그게 ‘남자들의 세상’이다. 그 세계에서 문학평론가가 되려면 ‘비위’(脾胃)가 아주 좋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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