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형제사철탕’은 ‘곰’과 ‘모란’이, ‘태양건강원’은 ‘이씨’와 그의 아들 ‘병구’가 운영한다. 두 가게는 나란히 붙어 있다. 곰과 이씨는 형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건물주와 세입자 관계다. ‘나’가 일곱 살 때 곰은 고아인 ‘나’를 찾아왔다. 곰은 마치 ‘개를 고르듯’ “눈빛을 보고 입을 벌려 안을 확인”하더니 ‘나’를 아들로 낙점했다. 그 후 ‘나’는 개를 도축해 두 식당에 납품하는 곰의 ‘아들’이자 ‘동업자’가 됐다. 곰은 ‘나’를 개 패듯 패며 개 잡는 법을 가르쳤고, 그걸 학습한 ‘나’는 개 농장을 물려받았다. 반면 허약하고 순진해 개를 잡지 못하는 병구는 모란에게 흠뻑 빠졌다. 곰은 “연변 아가씨”라 불리는 모란을 이씨에게는 ‘종업원’으로, ‘나’에게는 ‘딸’로 소개했다. 모란은 늘 곰의 뒤에서 말없이 개를 손질한다. ‘나’는 모란에게 고백하겠다는 병구의 멍청함을 깨닫게 하고자 곰과 모란이 나체로 함께 있는 풍경을 병구로 하여금 목도하게 했다. 병구는 건장한 곰에게 대들다가 개처럼 처맞고는 다음 날 개처럼 혀를 빼문 채 목을 맸다. 병구가 죽기 전 ‘나’에게 남긴 말은 “넌 개새끼와 개 같은 새끼 중 뭐가 더 기분이 나빠?”였다. 어느 날, 이씨는 다짜고짜 모란의 머리채를 잡았다. “너지. 이 씨팔년아. 네가 내 아들 홀렸지.” 그 광경을 본 곰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모란의 뺨을 때렸다. “쌍년이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고 있어. 죽을라고.” 곰은 한잔하자며 이씨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나갔다. ‘나’에게 모란이 쥐여준 영수증 조각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를 죽여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날 밤 ‘나’는 모란의 부탁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모란의 방에서 나오는 익숙한 실루엣의 왼쪽 복부에 칼을 찔러 넣었다. 곰이 ‘나’에게 가르쳐준 개 잡는 방식으로. 이상은 정용준의 단편 ‘개들’의 줄거리다. 이 소설은 흔히 폭력적인 아버지를 폭력적으로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세계에 입사하는 아들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이 바로 그 ‘폭력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세계’가 기실 ‘모란-여성’의 존재를 교환·소거해야만 유지되는 남성연대에 의한 것임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아버지-세계’ 앞에 선 ‘나’를 그 어떤 자기연민이나 미학화의 욕망 없이 그렸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은 남성을 ‘찌질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로 그리는 홍상수의 세계와도, 남성질서의 야만성을 묘사하기 위해 여성의 난자된 육체를 외설적으로 재현하는 김기덕의 영화와도, 야수성을 가진 남성육체들의 부딪침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남성 누아르의 세계와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재현의 욕망을 스스로 응시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만이 “개새끼”와 “개 같은 새끼”와 ‘개 아닌 새끼’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현실의 폭력을 자연화하지 않는 폭력의 재현’이라는 명제에 도전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을 한국 남성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도한 드문 사례로 기억한다. 최근 여성을 성적 존재로 환원하는 서술로 일관한 한 책의 저자는 그것이 ‘남성세계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남성성에 대한 성찰은 남성성을 말하는 방식 그 자체와 무관하지 않음을 그 저자가 하루빨리 배우길 바란다. 이제는 정말 “철이 들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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