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최근 성소수자의 삶을 서사화한 소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를 ‘소재주의’라고 표피적으로 진단하기 전에 그 문화사적 함의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간 성소수자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일지언정 세계의 총체성을 묘파하는 장편소설의 주체로는 거의 등장한 적 없다. 특히 동성애 서사는 동성애의 에로티시즘과 오르가슴을 비가시화함으로써 ‘동성애 없는 동성애 서사’로만 존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굵직한 서사적 계보를 가진 모든 문학적 주제들이 그렇듯, 성소수자 재현의 의미 있는 사례가 축적돼야 우리는 그 미학과 정치성의 머묾과 나아감을 말할 수 있다. 성소수자를 인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다룬 것이 선진화와 민주화의 감각을 고루 착장했다는 1987년 이후 한국문학사의 나르시시즘적 소산이라면, 자본과 노동신체의 유연화를 도모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젠더 이분법의 교란을 체화한 성소수자는 마치 경계인·노마드·유령처럼 낭만화됐다. 그리고 이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절멸만이 자기보존의 유일한 방식이 된 오늘날 성소수자의 재현은 이중구속에 처한 것 같다. 최근 한국문학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정체성 정치에 기투 하면서도 여느 엔(n)포 세대처럼 가난하고 고립된 ‘보통 청년’이라는 알리바이와 함께 등장한다. 사회경제적 불안정이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초래하는 삶의 무게를 압도하는 것으로 재현될 때에만 비로소 ‘보통 사람’으로서 대사회적 발언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하나 그렇다면 이건 성소수자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경제동물의 형상을 경유하지 않고는 ‘보통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사태, ‘보통 사람’의 기준이 너무 낮아진 우리 모두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두 레즈비언을 “기괴한 바이러스”에 뒤덮인 아포칼립스 세계에 배치한 최진영의 장편 <해가 지는 곳으로>의 설정은 흥미롭다. 이 소설은 바이러스 정체의 해명 따위에 관심 없다. 대신 모두가 평등하게 망가진 세계 자체에 집중한다. 어차피 가족도 고향도 없는 “피난민”으로 스스로를 인식한 이들에게 “재난 이후”는 비로소 “꿈”과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시공간이다. “우린 같이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재난을 기회로 삼는 이들’만 가득한 곳에서 순진하게 ‘사랑’이라니. 하나 이 소설의 ‘아포칼립스’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군대에서 체포되고, ‘차별금지’라는 당연한 요구마저 악다구니로 항변해야 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은유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재난 이후 폐허에 놓인 레즈비언의 형상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은 최근 개봉한 영화 <불온한 당신>에 등장하는 일본 레즈비언 커플 ‘논’과 ‘텐’과도 닮았다.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이 커플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항시 차별과 낙인의 위험에 놓인 성소수자에게는 일상이 재난’이라는 뜻 이상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으로 상상되는 재난 상황에서도 성소수자는 이중으로 배제된다. 이들에게는 ‘반려자를 찾을 권리’도 ‘호르몬치료를 제공받을 권리’도 없다. 이때 행해지는 ‘커밍아웃’은 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최선의 조치다. 이성애자 커플과의 같고 다름을 반복증명해야 했던 성소수자 서사는 이제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세계의 끝’에 놓인 퀴어들의 신체는 어떤 (불)가능성일까.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퀴어서사와 아포칼립스적 상상력 / 오혜진 |
문화연구자 최근 성소수자의 삶을 서사화한 소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를 ‘소재주의’라고 표피적으로 진단하기 전에 그 문화사적 함의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간 성소수자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일지언정 세계의 총체성을 묘파하는 장편소설의 주체로는 거의 등장한 적 없다. 특히 동성애 서사는 동성애의 에로티시즘과 오르가슴을 비가시화함으로써 ‘동성애 없는 동성애 서사’로만 존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굵직한 서사적 계보를 가진 모든 문학적 주제들이 그렇듯, 성소수자 재현의 의미 있는 사례가 축적돼야 우리는 그 미학과 정치성의 머묾과 나아감을 말할 수 있다. 성소수자를 인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다룬 것이 선진화와 민주화의 감각을 고루 착장했다는 1987년 이후 한국문학사의 나르시시즘적 소산이라면, 자본과 노동신체의 유연화를 도모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젠더 이분법의 교란을 체화한 성소수자는 마치 경계인·노마드·유령처럼 낭만화됐다. 그리고 이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절멸만이 자기보존의 유일한 방식이 된 오늘날 성소수자의 재현은 이중구속에 처한 것 같다. 최근 한국문학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정체성 정치에 기투 하면서도 여느 엔(n)포 세대처럼 가난하고 고립된 ‘보통 청년’이라는 알리바이와 함께 등장한다. 사회경제적 불안정이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초래하는 삶의 무게를 압도하는 것으로 재현될 때에만 비로소 ‘보통 사람’으로서 대사회적 발언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하나 그렇다면 이건 성소수자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경제동물의 형상을 경유하지 않고는 ‘보통 사람’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사태, ‘보통 사람’의 기준이 너무 낮아진 우리 모두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두 레즈비언을 “기괴한 바이러스”에 뒤덮인 아포칼립스 세계에 배치한 최진영의 장편 <해가 지는 곳으로>의 설정은 흥미롭다. 이 소설은 바이러스 정체의 해명 따위에 관심 없다. 대신 모두가 평등하게 망가진 세계 자체에 집중한다. 어차피 가족도 고향도 없는 “피난민”으로 스스로를 인식한 이들에게 “재난 이후”는 비로소 “꿈”과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시공간이다. “우린 같이 있어야 해. 그래야 안전해.” ‘재난을 기회로 삼는 이들’만 가득한 곳에서 순진하게 ‘사랑’이라니. 하나 이 소설의 ‘아포칼립스’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군대에서 체포되고, ‘차별금지’라는 당연한 요구마저 악다구니로 항변해야 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은유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재난 이후 폐허에 놓인 레즈비언의 형상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은 최근 개봉한 영화 <불온한 당신>에 등장하는 일본 레즈비언 커플 ‘논’과 ‘텐’과도 닮았다.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이 커플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항시 차별과 낙인의 위험에 놓인 성소수자에게는 일상이 재난’이라는 뜻 이상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으로 상상되는 재난 상황에서도 성소수자는 이중으로 배제된다. 이들에게는 ‘반려자를 찾을 권리’도 ‘호르몬치료를 제공받을 권리’도 없다. 이때 행해지는 ‘커밍아웃’은 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최선의 조치다. 이성애자 커플과의 같고 다름을 반복증명해야 했던 성소수자 서사는 이제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세계의 끝’에 놓인 퀴어들의 신체는 어떤 (불)가능성일까.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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