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두 권짜리 묵직한 장편소설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기꺼운 노동’이었다. 소설가 조선희가 12년 만에 펴낸 신작 <세 여자> 말이다. 꽤 보도됐듯, 이 책은 1920년대에 ‘신여성’이자 ‘마르크스 걸’로 성장해 한국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혁명가’로 기록된 세 여자, 허정숙·주세죽·고명자의 일대기를 다룬다. 그간 대중에게 식민지기와 해방기 혁명의 역사를 각인시킨 것은 박헌영·임원근·김단야·이재유·김원봉·강달영·김산 등의 남성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형형한 눈빛을 한 신념의 화신이자, 한반도에서 ‘총을 들고’ 도쿄와 상해, 만주와 모스크바 등지를 활보하며 ‘이동성’을 확보한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게다가 이들이 얽혀 있던 복잡한 이념지형과 노선·파벌 투쟁, 그리고 ‘민주화’ 이전까지 이 모든 공산주의 운동사가 ‘잊힌’ 역사였음을 고려하면 ‘혁명가’라는 그 재현 불가능한 초상에 독보적인 아우라가 부여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결심과 회유, 변절과 복권 같은 파란만장한 화소들로 점철된 이 역사에서 여성의 자리, 특히 ‘여성 혁명가’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허정숙·주세죽·고명자는 그 자신들도 혁명가였지만, 임원근·박헌영·김단야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기부터 지속돼온 여성 사회주의자들을 재현하는 오랜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1930년대에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적인 사회주의 담론에 등장한 맥락은 한정적이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이 투옥되자 그들의 동지이자 연인인 여성들의 수절 문제를 다룬 잡지 기사,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부인과 가정을 돌보며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겠다고 서약한 전향서를 통해서였다. 여성 사회주의자는 스캔들의 주인공 혹은 ‘전향’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당대 ‘여성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혁명의 서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또 다른 실험이다. 이 책은 “거리에서 여럿이 부르는 만세보다 집 안에서 혼자 부르는 만세가 더 어려운 법”이라며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홀로 타지에 나가는 세 여자의 첫걸음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밥하고 빨래는 여자들 시키는 혁명이라면 나는 사양하겠어요”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이들의 모습도 여느 혁명서사에서는 결코 본 적 없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가’를 그리겠다며 ‘먹고사니즘’에 충실한 경제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계형 독립운동가’ 혹은 ‘이해할 만한 친일파’를 묘사해온 최근의 혁명서사와도 구분된다. 이 책은 ‘세 여자’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자의식을 가진 채 스스로 성장하고 결단하는 주체로 그렸다. 그리고 이 재현은 “여자라는 것은 국수주의자에게로 가면 국수주의자가 되고 공산주의자에게 가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모양”(김기진)이라는 여성 혁명가에 대한 오랜 조롱을 전복한다. 요컨대 ‘혁명의 젠더’와 ‘젠더의 혁명’을 동시에 질문해야 했던 여성 혁명가들의 고민과 실천을 전면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여성 혁명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섬세하게 되짚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책이 한 일이다. 누군가는 세 여자에게서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자신의 전사(前史)를 읽을 테고, 또 누군가는 나혜석이 전부인 줄 알았던 페미니스트의 새 계보를 발견했다며 환호할 테다. 이제 ‘세 여자’의 삶을 음미하고 성찰하는 30만명, 300만명의 독자들을 만날 일이 남았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한반도에서 ‘여성 혁명가’로 산다는 것 / 오혜진 |
문화연구자 두 권짜리 묵직한 장편소설을 읽는 일은 그야말로 ‘기꺼운 노동’이었다. 소설가 조선희가 12년 만에 펴낸 신작 <세 여자> 말이다. 꽤 보도됐듯, 이 책은 1920년대에 ‘신여성’이자 ‘마르크스 걸’로 성장해 한국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혁명가’로 기록된 세 여자, 허정숙·주세죽·고명자의 일대기를 다룬다. 그간 대중에게 식민지기와 해방기 혁명의 역사를 각인시킨 것은 박헌영·임원근·김단야·이재유·김원봉·강달영·김산 등의 남성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형형한 눈빛을 한 신념의 화신이자, 한반도에서 ‘총을 들고’ 도쿄와 상해, 만주와 모스크바 등지를 활보하며 ‘이동성’을 확보한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게다가 이들이 얽혀 있던 복잡한 이념지형과 노선·파벌 투쟁, 그리고 ‘민주화’ 이전까지 이 모든 공산주의 운동사가 ‘잊힌’ 역사였음을 고려하면 ‘혁명가’라는 그 재현 불가능한 초상에 독보적인 아우라가 부여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결심과 회유, 변절과 복권 같은 파란만장한 화소들로 점철된 이 역사에서 여성의 자리, 특히 ‘여성 혁명가’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허정숙·주세죽·고명자는 그 자신들도 혁명가였지만, 임원근·박헌영·김단야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기부터 지속돼온 여성 사회주의자들을 재현하는 오랜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1930년대에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적인 사회주의 담론에 등장한 맥락은 한정적이다. 남성 사회주의자들이 투옥되자 그들의 동지이자 연인인 여성들의 수절 문제를 다룬 잡지 기사,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부인과 가정을 돌보며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겠다고 서약한 전향서를 통해서였다. 여성 사회주의자는 스캔들의 주인공 혹은 ‘전향’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당대 ‘여성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혁명의 서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또 다른 실험이다. 이 책은 “거리에서 여럿이 부르는 만세보다 집 안에서 혼자 부르는 만세가 더 어려운 법”이라며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홀로 타지에 나가는 세 여자의 첫걸음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밥하고 빨래는 여자들 시키는 혁명이라면 나는 사양하겠어요”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이들의 모습도 여느 혁명서사에서는 결코 본 적 없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가’를 그리겠다며 ‘먹고사니즘’에 충실한 경제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계형 독립운동가’ 혹은 ‘이해할 만한 친일파’를 묘사해온 최근의 혁명서사와도 구분된다. 이 책은 ‘세 여자’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자의식을 가진 채 스스로 성장하고 결단하는 주체로 그렸다. 그리고 이 재현은 “여자라는 것은 국수주의자에게로 가면 국수주의자가 되고 공산주의자에게 가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모양”(김기진)이라는 여성 혁명가에 대한 오랜 조롱을 전복한다. 요컨대 ‘혁명의 젠더’와 ‘젠더의 혁명’을 동시에 질문해야 했던 여성 혁명가들의 고민과 실천을 전면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여성 혁명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섬세하게 되짚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책이 한 일이다. 누군가는 세 여자에게서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자신의 전사(前史)를 읽을 테고, 또 누군가는 나혜석이 전부인 줄 알았던 페미니스트의 새 계보를 발견했다며 환호할 테다. 이제 ‘세 여자’의 삶을 음미하고 성찰하는 30만명, 300만명의 독자들을 만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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