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노동자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독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한 말이다. 음흉하고 간악한 위정자들이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구절 같다. 하지만 전쟁이 지배자의 정복욕이나 상대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희망을 읽었다. 전쟁이 정치라면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으로 징병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 참여할 수 있다. 각 나라의 국민들이 전쟁을 불사하자는 지도자들을 낙마시키고, 전쟁으로 먹고사는 군수회사들을 견제한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미사일을 하늘로 날리는 김정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평화의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북한 정권에 날아들기를 바랄 것이다. 너무 쉽게 전쟁을 입에 올리는 트럼프를 보면, 그를 뽑은 미국 시민들이 원망스럽다. 다행히 미국에도 평화를 바라는 주권자가 존재한다. 1967년 가을, 크레이그 앤더슨씨를 포함한 4인의 군인들은 일본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 인트레피드호를 탈출한다.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 총을 버린 군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난의 총알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밝혀진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국가를 배반한 탈영병으로 기억해야 할까, 부도덕한 전쟁에 맞선 용감한 시민으로 기억해야 할까.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사태는 더 분명해진다. 22일 선거를 치른 아베는 일본의 머리 위로 북한 미사일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국민의 머릿속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심으려 한다. 만약 아베 정부에 맞서 헌법 9조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일본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양심 있는 세계시민이라 칭찬할 것이고, 일본 정부는 매국노라 비난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탈영병이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라 불리는 이들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양심도, 용기도 없는 인간들이라며 온갖 비난과 조롱에 시달리다 1년6개월간 감옥에 보내진다. 전쟁 없는 세상,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과 같이 한국 군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평화단체들도 있다. 강제징집제도를 바꾸려는 이들의 노력을 비웃듯 여성도 징병을 하자는 청와대 청원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국방의 의무가 신성하다는 것과 나라를 지키러 군대에 간다는 주장이 무너져 버린다. 신성하다면 보상을 바라지 않을 테고, 군대의 목적이 국방이라면 성별에 따른 징병의 불공평이 아니라, 징병제가 군사적으로 효율적인가를 먼저 따져야 할 것이다. 사실은 미군의 힘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한국 남성들이 북한의 위협보다는 2년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문제에 몰두하여 화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왕 화가 났다면, 징병제를 유지하는 정부와 한반도의 긴장을 바라는 강대국, 무기 상인들에게 분노를 돌려보자. 다음달 미군의 최고사령관 트럼프가 아베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간다. 어떻게든 국민들에게 군복을 입히려는 이들에 맞서 다 같이 군복을 벗어버리는 건 어떨까. 마침 27일 미군의 탈영병 앤더슨씨도 평화를 바라는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간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병역거부자들도 앤더슨씨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 싼값에 국민을 군인으로 만들고,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파괴할 전쟁을 일으키려는 세계의 통치자들에게 평화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 진정한 국방의 의무가 아닐까.
칼럼 |
[2030 잠금해제] 평화를 향한 탈영 / 박정훈 |
알바 노동자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독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한 말이다. 음흉하고 간악한 위정자들이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구절 같다. 하지만 전쟁이 지배자의 정복욕이나 상대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희망을 읽었다. 전쟁이 정치라면 우리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으로 징병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 참여할 수 있다. 각 나라의 국민들이 전쟁을 불사하자는 지도자들을 낙마시키고, 전쟁으로 먹고사는 군수회사들을 견제한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미사일을 하늘로 날리는 김정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평화의 가치를 지닌 지도자가 북한 정권에 날아들기를 바랄 것이다. 너무 쉽게 전쟁을 입에 올리는 트럼프를 보면, 그를 뽑은 미국 시민들이 원망스럽다. 다행히 미국에도 평화를 바라는 주권자가 존재한다. 1967년 가을, 크레이그 앤더슨씨를 포함한 4인의 군인들은 일본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 인트레피드호를 탈출한다.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 총을 버린 군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난의 총알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밝혀진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국가를 배반한 탈영병으로 기억해야 할까, 부도덕한 전쟁에 맞선 용감한 시민으로 기억해야 할까.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사태는 더 분명해진다. 22일 선거를 치른 아베는 일본의 머리 위로 북한 미사일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국민의 머릿속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심으려 한다. 만약 아베 정부에 맞서 헌법 9조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일본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양심 있는 세계시민이라 칭찬할 것이고, 일본 정부는 매국노라 비난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탈영병이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라 불리는 이들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양심도, 용기도 없는 인간들이라며 온갖 비난과 조롱에 시달리다 1년6개월간 감옥에 보내진다. 전쟁 없는 세상,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과 같이 한국 군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평화단체들도 있다. 강제징집제도를 바꾸려는 이들의 노력을 비웃듯 여성도 징병을 하자는 청와대 청원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국방의 의무가 신성하다는 것과 나라를 지키러 군대에 간다는 주장이 무너져 버린다. 신성하다면 보상을 바라지 않을 테고, 군대의 목적이 국방이라면 성별에 따른 징병의 불공평이 아니라, 징병제가 군사적으로 효율적인가를 먼저 따져야 할 것이다. 사실은 미군의 힘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한국 남성들이 북한의 위협보다는 2년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문제에 몰두하여 화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왕 화가 났다면, 징병제를 유지하는 정부와 한반도의 긴장을 바라는 강대국, 무기 상인들에게 분노를 돌려보자. 다음달 미군의 최고사령관 트럼프가 아베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간다. 어떻게든 국민들에게 군복을 입히려는 이들에 맞서 다 같이 군복을 벗어버리는 건 어떨까. 마침 27일 미군의 탈영병 앤더슨씨도 평화를 바라는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간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병역거부자들도 앤더슨씨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 싼값에 국민을 군인으로 만들고,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파괴할 전쟁을 일으키려는 세계의 통치자들에게 평화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 진정한 국방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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