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작가 한강의 글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남한은 몸서리친다”며 인류애에 호소해 반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라는 표현과 그 역사의식을 문제 삼았지만, 이는 뿌리 깊은 숭미주의 혹은 외교상의 위험을 강박적으로 의식한 탓일 테다. 내게 그 글이 문제적으로 읽힌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하나는 미국이 북한을 압도하기 위한 선택지로 전쟁을 제시할 때, 그 글은 남한 시민이 받을 고통만 묘사할 뿐 정작 북한 민중의 존재는 삭제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전쟁은 북한이 아닌 남한에 피해를 줄 뿐’이라는 논리는 전쟁 자체의 폭력성과 반인륜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될 수 없다. 이는 차라리 미국의 대북논리에 깃든 북한에 대한 타자화를 반복한다. 더 수상한 것은 그 글의 ‘지나친’ 아름다움이다. 작가는 전쟁으로 훼손될지 모를 남한 시민의 일상을 매우 시적으로 묘사했다. ‘노란 버스에 오르는 유치원생들, 꽃과 케이크를 들고 카페에 가는 연인들,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의 젖은 머리카락…’. 이 서정적이고 무해한 일상은 지난겨울의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서사에 의하면, 남한은 상시적인 북한의 도발 가능성 앞에 무심한 듯 “생존가방”을 챙기며 오직 “촛불”이라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무고하고 잠재적인 피해자다. 한국인의 자아상을 선량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이 상상력은 최근 대중서사에도 자주 나타난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은 왜 꼭 정치적·이념적 편향 없이 그저 가장의 소명과 직분윤리만을 지닌 소시민이어야 했나. 이기호의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에서 간첩조작사건에 휘말리는 주인공 역시 고아이자 문맹인 ‘양민’이다. 영문 모른 채 폭력적인 역사 한가운데로 소환된 이들이 영웅적 용기를 발휘해 역사의 결정적 장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고양된 정치의식이 아니라 ‘민중 특유의 무지에 의한 건강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량하고 무고한 양민’, 한강의 표현대로라면 “순수하고 나약한(weak and unsullied)” 것이야말로 지난 시대에 지식인들이 만들고 극복하려 한 ‘상상된 민중’의 상 아닌가. 게다가 스스로를 무조건 역사의 피해자 위치에 두는 이 무성찰은 가장 안전하게 역사적 시민권을 확보하려는 욕망과 만난다. 오랜 식민경험과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결과겠다. 과연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가. 많은 증언에서 보듯, 지난 촛불광장에는 경찰에 의해 상해를 입은 농민들, 모욕과 성추행에 시달린 여성과 성소수자들, 정보접근권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장애인들이 있었다. 당연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공격과 배제의 장면이 없었을 리 없다. 오히려 그 모든 이질적인 경험들을 ‘평화’라는 허구의 틀로 묶고 ‘동질적인 것’으로만 말하려는 욕망 자체가 더 폭력적이다. 진정한 용기는 전세계 선진국들을 향해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일보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라고 확신에 차 외치던 한 아이가 베트남 출신 친구에게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최은영, <씬짜오, 씬짜오>)라고 비로소 사과를 건네는 그 장면에 있을지 모른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선량한 피해자들의 나라 / 오혜진 |
문화연구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작가 한강의 글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남한은 몸서리친다”며 인류애에 호소해 반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라는 표현과 그 역사의식을 문제 삼았지만, 이는 뿌리 깊은 숭미주의 혹은 외교상의 위험을 강박적으로 의식한 탓일 테다. 내게 그 글이 문제적으로 읽힌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하나는 미국이 북한을 압도하기 위한 선택지로 전쟁을 제시할 때, 그 글은 남한 시민이 받을 고통만 묘사할 뿐 정작 북한 민중의 존재는 삭제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전쟁은 북한이 아닌 남한에 피해를 줄 뿐’이라는 논리는 전쟁 자체의 폭력성과 반인륜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될 수 없다. 이는 차라리 미국의 대북논리에 깃든 북한에 대한 타자화를 반복한다. 더 수상한 것은 그 글의 ‘지나친’ 아름다움이다. 작가는 전쟁으로 훼손될지 모를 남한 시민의 일상을 매우 시적으로 묘사했다. ‘노란 버스에 오르는 유치원생들, 꽃과 케이크를 들고 카페에 가는 연인들,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의 젖은 머리카락…’. 이 서정적이고 무해한 일상은 지난겨울의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서사에 의하면, 남한은 상시적인 북한의 도발 가능성 앞에 무심한 듯 “생존가방”을 챙기며 오직 “촛불”이라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무고하고 잠재적인 피해자다. 한국인의 자아상을 선량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이 상상력은 최근 대중서사에도 자주 나타난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은 왜 꼭 정치적·이념적 편향 없이 그저 가장의 소명과 직분윤리만을 지닌 소시민이어야 했나. 이기호의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에서 간첩조작사건에 휘말리는 주인공 역시 고아이자 문맹인 ‘양민’이다. 영문 모른 채 폭력적인 역사 한가운데로 소환된 이들이 영웅적 용기를 발휘해 역사의 결정적 장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고양된 정치의식이 아니라 ‘민중 특유의 무지에 의한 건강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량하고 무고한 양민’, 한강의 표현대로라면 “순수하고 나약한(weak and unsullied)” 것이야말로 지난 시대에 지식인들이 만들고 극복하려 한 ‘상상된 민중’의 상 아닌가. 게다가 스스로를 무조건 역사의 피해자 위치에 두는 이 무성찰은 가장 안전하게 역사적 시민권을 확보하려는 욕망과 만난다. 오랜 식민경험과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결과겠다. 과연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가. 많은 증언에서 보듯, 지난 촛불광장에는 경찰에 의해 상해를 입은 농민들, 모욕과 성추행에 시달린 여성과 성소수자들, 정보접근권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장애인들이 있었다. 당연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공격과 배제의 장면이 없었을 리 없다. 오히려 그 모든 이질적인 경험들을 ‘평화’라는 허구의 틀로 묶고 ‘동질적인 것’으로만 말하려는 욕망 자체가 더 폭력적이다. 진정한 용기는 전세계 선진국들을 향해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일보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라고 확신에 차 외치던 한 아이가 베트남 출신 친구에게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최은영, <씬짜오, 씬짜오>)라고 비로소 사과를 건네는 그 장면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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