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ㅎ대학에서 했던 페미니즘 강연의 여파가 크다. ‘페미니즘으로 위장해 동성애와 문란한 성생활을 설파하는’ 강연을 주최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가정과 결혼을 꿈꾸는 그들은 동성애자와 문란한 여자가 학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가엾은 나(페미니즘에 빠진 문란한 여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하니 할 말을 잃었다. 가엾은 타인을 염려하는 건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서 건강한 자아로 살아가기 편리한 방식이다. 도덕주의자들은 그 낙으로 생의 허무를 견딘다. (성전을 부수고 다녔던 예수님은 앵무새처럼 경전만 외우는 그 도덕경찰들에게 질려버렸을 거다.) 차라리 말이 없는 자본주의에 위로를 받는다. 생각을 예민하게 깨워두려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입에 문다. 그것들을 사러 상점에 가면, 아주 가끔 내 머리 색깔이 왜 그런지 묻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하다. 그들은 나의 사연에 관심이 없다. 자본주의가 무시무시한 건 이 친절함 때문이다. 담배와 커피는 말이 없다. 편의점에서 산 담배는 나에게 “몸에 안 좋게 담배를 몇 갑이나 피우는 거지?”, “너는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결혼하지 않는 거지?”, “여자인데 담배 피우는 것을 보니 애 낳을 생각은 없구나?”, “무슨 일이 있길래 길거리를 헤매면서 나를 물고 있니?”라고 묻지 않는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고는 오만과 편견이 전부인 세상에서 숫자로 거래되는 건 구원이 되기도 한다. 지레짐작되는 것보다 숫자로 익명이 되는 게 나으니까. 외롭지만 다치지 않는 방법이다. 내가 소비하는 상호작용에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서운 생각이 엄습한다. 영원히 거래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타자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최선의 방식일까, 숫자로 거래되는 지금의 방식은. 이런 생각이 가능하려면 새벽 내내 일하면서도 야간수당을 받지 못하는, 방금 편의점 계산대에서 마주친 그 사람의 얼굴을 까먹어버려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나의 뇌에서 타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지워버린다. 나의 손아귀와 타자의 얼굴 사이에 두꺼운 장막을 세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장막 안에서 혁명 따위를 잊는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소설집을 주문하고 결제 버튼을 누른다. 나름의 싸움이다. 내가 있는 곳은 노트북이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인 한 평 안 되는 공간이다. 나의 세계는 책으로 다시 확장되고 나라고 불리는 정체성의 8할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담당한다. 내 옆에는 바닥에 떨어진 볼펜 끝을 씹고 있는 강아지 커리와 다시 만난 동거인이 있다.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되 서로를 아는 체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무 일도 없이 새해는 시작될 거고, 아무렇지도 않게 별난 일들이 지나갈 거다. 새해에는 더 적은 바람으로 덜 소비하게 되면 좋겠다. 하나님! 타자를 걱정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저를 구원해주소서. 의미를 소비하거나 생산하려는 저의 뒤통수를 때려주시고 장막을 파열시킬 힘을 주소서. 나 또한 분열된 인간이라는 걸, 소비에 중독된 인간이라는 걸 까먹지 않게 하소서. 나를 내가 타자로 느끼게 하소서, 아멘. 새해니까 근사한 소원도 빌어본다. 임신중절수술 합법화, 차별금지법 제정. 이건 사람을 죽이는 혐오의 다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는 구급의약품이다. 법은 원래 바보였지만, 이것조차 안 하는 국가공동체는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싸움들 / 홍승희 |
예술가 ㅎ대학에서 했던 페미니즘 강연의 여파가 크다. ‘페미니즘으로 위장해 동성애와 문란한 성생활을 설파하는’ 강연을 주최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가정과 결혼을 꿈꾸는 그들은 동성애자와 문란한 여자가 학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가엾은 나(페미니즘에 빠진 문란한 여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하니 할 말을 잃었다. 가엾은 타인을 염려하는 건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서 건강한 자아로 살아가기 편리한 방식이다. 도덕주의자들은 그 낙으로 생의 허무를 견딘다. (성전을 부수고 다녔던 예수님은 앵무새처럼 경전만 외우는 그 도덕경찰들에게 질려버렸을 거다.) 차라리 말이 없는 자본주의에 위로를 받는다. 생각을 예민하게 깨워두려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입에 문다. 그것들을 사러 상점에 가면, 아주 가끔 내 머리 색깔이 왜 그런지 묻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하다. 그들은 나의 사연에 관심이 없다. 자본주의가 무시무시한 건 이 친절함 때문이다. 담배와 커피는 말이 없다. 편의점에서 산 담배는 나에게 “몸에 안 좋게 담배를 몇 갑이나 피우는 거지?”, “너는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결혼하지 않는 거지?”, “여자인데 담배 피우는 것을 보니 애 낳을 생각은 없구나?”, “무슨 일이 있길래 길거리를 헤매면서 나를 물고 있니?”라고 묻지 않는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고는 오만과 편견이 전부인 세상에서 숫자로 거래되는 건 구원이 되기도 한다. 지레짐작되는 것보다 숫자로 익명이 되는 게 나으니까. 외롭지만 다치지 않는 방법이다. 내가 소비하는 상호작용에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서운 생각이 엄습한다. 영원히 거래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타자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최선의 방식일까, 숫자로 거래되는 지금의 방식은. 이런 생각이 가능하려면 새벽 내내 일하면서도 야간수당을 받지 못하는, 방금 편의점 계산대에서 마주친 그 사람의 얼굴을 까먹어버려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나의 뇌에서 타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지워버린다. 나의 손아귀와 타자의 얼굴 사이에 두꺼운 장막을 세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장막 안에서 혁명 따위를 잊는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소설집을 주문하고 결제 버튼을 누른다. 나름의 싸움이다. 내가 있는 곳은 노트북이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인 한 평 안 되는 공간이다. 나의 세계는 책으로 다시 확장되고 나라고 불리는 정체성의 8할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담당한다. 내 옆에는 바닥에 떨어진 볼펜 끝을 씹고 있는 강아지 커리와 다시 만난 동거인이 있다.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되 서로를 아는 체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무 일도 없이 새해는 시작될 거고, 아무렇지도 않게 별난 일들이 지나갈 거다. 새해에는 더 적은 바람으로 덜 소비하게 되면 좋겠다. 하나님! 타자를 걱정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저를 구원해주소서. 의미를 소비하거나 생산하려는 저의 뒤통수를 때려주시고 장막을 파열시킬 힘을 주소서. 나 또한 분열된 인간이라는 걸, 소비에 중독된 인간이라는 걸 까먹지 않게 하소서. 나를 내가 타자로 느끼게 하소서, 아멘. 새해니까 근사한 소원도 빌어본다. 임신중절수술 합법화, 차별금지법 제정. 이건 사람을 죽이는 혐오의 다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는 구급의약품이다. 법은 원래 바보였지만, 이것조차 안 하는 국가공동체는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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