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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1 17:09 수정 : 2018.01.21 19:08

이은지
문학평론가

성차별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분노가 여혐문학을 색출하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지난해의 일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여혐의 혐의가 있는 문학을 검열하고 통제한다고 해서 과연 현실의 혐오 정서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한 설혹 그것이 성립하더라도 애초에 문학을 문화의 일종으로 향유하는 독자 자체가 태부족한 현실을 고려했을 때 ‘여혐 문학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운운하는 것이 좀 멋쩍게 여겨졌다.

그렇게 문학 내 여혐 논란에 대한 입장을 나름으로 갖고 있던 차에 작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임현의 단편 ‘고두’(叩頭)를 두고 벌어졌던 소란을 뒤늦게 전해 듣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남성 윤리 교사가 자신이 가르쳤던 여고생과 잠자리를 가졌던 일을 회상하는 해당 소설의 소재가 여성혐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소설이 여혐 소재를 단순히 탐닉하거나 재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가치 규범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지를 폭로하기 위한 장치의 일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윤리 과목을 가르치면서도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음을 체득하고 있는 윤리 교사는 선한 행위의 진정성보다 ‘형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용의 진위와 상관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꿇는 자세”를 정확하게 취하는 자는 이러한 형식의 준수를 통해 상대에게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타적 행위로부터 선의와 진정성보다는 도덕적 우위를 읽어내는 화자의 자기기만적 궤변은 가식과 위선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 지금의 각자도생하는 정글에서는 이타적인 행위마저도 강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처세에 불과하게 된 셈이다. 그렇기에 관계를 가진 뒤 한동안 잠적했던 여고생이 부른 배를 하고 교무실에 나타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랑했다고, 사랑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완벽한 사과의 자세”를 화자는 두려워한다. 그 완벽한 형식상의 우위는 화자를 도덕적으로 무릎 꿇리고 나아가 학교에서 파면시킨다.

한편 여고생의 도덕적으로 완벽한 형식이 전하는 내용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술집에서 일하고 모텔에 드나든다는 둥 여러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여고생이 실은 결손가정에 밤늦게 식당 일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윤리 교사는 우연히 알게 된다. 그는 늦은 귀갓길에 동행하는 등 선생으로서 최소한의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나쁜 소문으로부터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여고생과 관계를 갖기에 이른다. 그런 윤리 교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고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생존을 위한 어떤 안전장치도 보장받지 못하는 여고생이 자신에게 (진정성의 여부는 막론하고) 손을 내밀어준 교사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란 교사 대 학생이라고 하는 강자 대 약자의 권력 구도가 사랑으로 치환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요컨대 여고생의 사랑과 윤리 교사의 도덕은 동일한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 셈이다. 이처럼 ‘고두’가 일관되게 드러내고 있는,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가치의 내용과 형식 간의 괴리에 주목했을 때 여혐문학이라는 낙인은 무색해진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기만적 가치 체계를 떠받치는 현실의 물적 토대야말로 여혐을 비롯한 각종 혐오 정서의 기원이자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짜 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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