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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12 21:28 수정 : 2018.08.12 21:37

허승규
녹색정치 활동가

청소년 시절 즐겨 봤던 추억의 예능프로그램 제목은 ‘몰래카메라’(줄여서 ‘몰카’)였다. 몰래카메라로 연예인들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려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몰카’란 이름에는 재미와 유머 코드가 담겨 있었다. 친구들끼리 여행 가서 누군가 없는 틈에 상황극을 하며 즐겼던 놀이의 이름도 ‘몰카’였다. ‘몰카’ 때문에 감정 상할 순 있지만, 다수의 관찰자의 재미를 위해 분노와 당혹의 감정은 쿨하게 보내야 한다. 친구들끼리 웃고 즐기는데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은 어색하다. ‘몰카’가 밝혀진 순간 속임을 당한 자는 정색하기보다 함께 웃고 즐겨야 멋진 마무리가 연출된다.

‘몰카’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성적 욕망에 눈을 뜨면서 접하는, 만 19살 미만 관람불가 야한 동영상이 ‘야동’이다. 야동은 금기의 영역이자 성적 욕망의 일탈로 인정되며 주로 남성 청소년들의 유머와 추억의 코드로 언급된다. 주로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야동은 하나의 취향, 문화로 자리 잡았고, 돈이 오가는 산업의 성격을 띤다. 예능프로그램과 친구들의 상황극이었던 ‘몰카’는 ‘야동’의 영역에선 말 그대로 ‘몰래’ 촬영되어 소비된다. 야동을 즐기며 소비하는 행위에서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은 만 19살이냐 아니냐는 저열한 수준에 머물며 ‘몰카’의 문제점도 가려진다.

이제 ‘몰카’는 재미와 추억, 욕망의 코드가 아니다. 누군가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자신의 삶이 무너진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가해는 은폐되고 피해가 소비되는 사회에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에 연대하며,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이 사라진 왜곡된 욕망과 소비의 문화에 맞서 싸워온 이들이 있었다. 안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화장실 가기조차 두려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릴 수 없는 몰카 문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몰카’를 지워주는 업체와 ‘몰카’가 유통되는 업체의 유착 관계가 드러났다. 피해자들을 다시 한번 죽음으로 내몰았던 산업 구조는 충격적이다. 거리의 정치를 넘어 국회와 정부 차원의 정치가 절실하다.

한편 ‘몰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문제들을 드러내기 위해 오용된 단어를 바로잡았다. ‘몰카’로 지칭되는 행위는 엄연한 ‘불법촬영’이다. 범죄를 낭만화할 수 있는 언어는 재구성되었다. ‘불법촬영’으로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몰카’를 둘러싼 법과 제도, 문화가 단번에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불법촬영’은 ‘몰카’를 찍고, 퍼뜨리고, 소비하는 행위를 불법행위이자 범죄행위로 명백하게 규정한다. 웹하드에서 몇백원을 주고 ‘몰카’를 소비하는 행위는, 개인의 일탈과 취향이 아닌 법적인 제재와 윤리적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필자는 불법촬영 문제의 심각성을 늦게 알았다. 기껏해야 나의 도덕적 수준은 ‘몰카는 안 봐야지’였다. 이제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의 성찰과 전환에 늦었지만 동참하고 싶다. ‘몰래카메라’를 ‘불법촬영’으로 부르며 익숙한 문화, 둔감한 윤리를 건드리자.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언어를 확산시키자. 안전하게 사랑하고, 편안하게 화장실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이러한 사회는 남성들도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그동안 불법촬영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에게 존경과 감사, 사과를 드린다. 죽음을 선택한 피해자들에게도 추모를 드린다. 필자도 함께 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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