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페이스 대표 서울 안국동의 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 벽을 따라 걸으면, 첫 벽면에는 하얀 배경에 까만 선과 점으로 표현된 아이폰 그림이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평소에 자신이 쓰는 스마트폰을 직접 그린 그림이다. 그다음 코너에는 앱 아이콘이 양각으로 표현된 촉각책이 있다. 설정 아이콘을 손으로 만지면 네모난 형상 안의 톱니바퀴가 느껴졌다. 그 옆에는 연회색 배경에 진회색으로 구멍이 있는 모습이라고 점자로 함께 써두었다. “시각장애인들은 음성 지원 기능이 좋다는 이유로 아이폰을 많이 사용한다. 매일 쓰는 아이폰과 그 안의 아이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게 된 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촉각과 청각이라는 통로로 충분히 풍부하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의 기본값이 좋았다. ‘본다’는 것은 눈의 작용이 아니라 뇌의 작용이고, 누구든 손끝으로 만날 수 있는 평등한 그림, 평등한 언어가 있다는 깨달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평균의 폭력’이 있다. 지난해 우리 매체 닷페이스에서 시각장애인연합회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앱을 사용할 때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쉽게 소외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커다랗고 화려한 이미지, 또는 칸칸이 분류된 선택 버튼은 ‘평균적으로는’ 읽히기 좋다. 효과적인 시각적 수단이지만, 각 항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사용해보면 이미지는 ‘이미지’라고만 읽어준다. 버튼도 ‘버튼’이라고만 읽는다. 아니, 버튼을 ‘버튼’이라고만 말하면 그게 어떤 버튼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확인’ 버튼인지 ‘취소’ 버튼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시계 회사에서는 시각과 촉각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를 판다. 이곳에서 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광고 사진에 텍스트로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설명을 써놓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고,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척 보면 한눈에 알 만한 내용을 굳이 왜 이런 설명을 덧붙였나 싶었는데, 게시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었다. 평등한 언어란 다양한 언어다. 평등한 언어란 더 다양한 접근 경로다. 불평등이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지만 길게 보면 평등이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휠체어 리프트보다 엘리베이터가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시각으로도 청각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앱 디자인이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모임에서 ‘문자 통역’을 지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올해부터는 일정 규모 이상의 모임을 주최할 때 꼭 문자 통역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연사와 청중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음성만으로 정보값이 부족할 수 있다. 바로바로 문자로 이야기가 기록되면,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많은 사람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평등은 점점 더 효율적인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 특히나 한국 같은 고령화 사회에선. 앞으로 이 사회의 기본값은 저시력자이거나, 보행 보조기가 필요한, 청력이 저하된 사람이 될 것이다. 약자를 기준으로 한 사회 설계는 노인, 장애인, 임산부 등 모두에게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사회에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뜻한 마음은 필요 없다. 이것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혁신, 효율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평등은 따뜻할 필요가 없다 / 조소담 |
닷페이스 대표 서울 안국동의 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 벽을 따라 걸으면, 첫 벽면에는 하얀 배경에 까만 선과 점으로 표현된 아이폰 그림이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평소에 자신이 쓰는 스마트폰을 직접 그린 그림이다. 그다음 코너에는 앱 아이콘이 양각으로 표현된 촉각책이 있다. 설정 아이콘을 손으로 만지면 네모난 형상 안의 톱니바퀴가 느껴졌다. 그 옆에는 연회색 배경에 진회색으로 구멍이 있는 모습이라고 점자로 함께 써두었다. “시각장애인들은 음성 지원 기능이 좋다는 이유로 아이폰을 많이 사용한다. 매일 쓰는 아이폰과 그 안의 아이콘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게 된 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촉각과 청각이라는 통로로 충분히 풍부하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그 생각의 기본값이 좋았다. ‘본다’는 것은 눈의 작용이 아니라 뇌의 작용이고, 누구든 손끝으로 만날 수 있는 평등한 그림, 평등한 언어가 있다는 깨달음.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평균의 폭력’이 있다. 지난해 우리 매체 닷페이스에서 시각장애인연합회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앱을 사용할 때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쉽게 소외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커다랗고 화려한 이미지, 또는 칸칸이 분류된 선택 버튼은 ‘평균적으로는’ 읽히기 좋다. 효과적인 시각적 수단이지만, 각 항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사용해보면 이미지는 ‘이미지’라고만 읽어준다. 버튼도 ‘버튼’이라고만 읽는다. 아니, 버튼을 ‘버튼’이라고만 말하면 그게 어떤 버튼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확인’ 버튼인지 ‘취소’ 버튼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시계 회사에서는 시각과 촉각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를 판다. 이곳에서 올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광고 사진에 텍스트로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설명을 써놓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고,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척 보면 한눈에 알 만한 내용을 굳이 왜 이런 설명을 덧붙였나 싶었는데, 게시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었다. 평등한 언어란 다양한 언어다. 평등한 언어란 더 다양한 접근 경로다. 불평등이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지만 길게 보면 평등이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휠체어 리프트보다 엘리베이터가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시각으로도 청각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앱 디자인이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다. 모임에서 ‘문자 통역’을 지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올해부터는 일정 규모 이상의 모임을 주최할 때 꼭 문자 통역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연사와 청중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음성만으로 정보값이 부족할 수 있다. 바로바로 문자로 이야기가 기록되면,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많은 사람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평등은 점점 더 효율적인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 특히나 한국 같은 고령화 사회에선. 앞으로 이 사회의 기본값은 저시력자이거나, 보행 보조기가 필요한, 청력이 저하된 사람이 될 것이다. 약자를 기준으로 한 사회 설계는 노인, 장애인, 임산부 등 모두에게 효율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사회에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뜻한 마음은 필요 없다. 이것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혁신, 효율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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