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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7 20:43 수정 : 2018.10.07 23:33

이은지
문학평론가

창비학당과 함께 하는 요즘비평포럼은 지난달 ‘재현의 폭력과 폭력의 재현’을 주제로 작가, 비평가, 독자 등 여러 패널을 모시고 좌담회를 열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관성적으로 생산해온 재현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은 어느덧 이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버틀러가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재배치될 뿐’이라고 일찍이 통찰하였듯이, 제아무리 진보적이고 반성적인 담론일지라도 지배적인 위치를 획득하는 순간 그 위치가 발휘하는 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포럼은 이에 대한 반성적 논의까지 아우르는 자리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폭력의 재현을 재현의 폭력으로 환원하려는 태도 자체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한 패널의 목소리였다. 그의 발언이 진정성 있게 다가온 까닭은 그 자신이 한때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음을 고백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실제 폭력에 비하면 폭력의 재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상으로서의 재현은 현실에서의 폭력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발언을 들으며 나 또한 관련된 사례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는 말런 브랜도 주연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서, 영화의 정사 장면이 실제 강간 장면이었음이 최근 밝혀져 논란이 된 바 있다. 나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한편 원초적인 호기심에 이끌려 오래전 보았던 그 영화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보면서는 그 장면이 실제 강간 장면이어서가 아니라, 그 장면이 그럼에도 전혀 선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장면만 보고서는 그 누구도 여배우의 고통과 감독의 파렴치함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었다.

또 다른 사례는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영화이다. 티브이(TV) 촬영감독인 주인공은 30분가량의 좀비물을 ‘원테이크 라이브’로 찍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관객은 영화 초반에 이 제안의 결과물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딘가 매끄럽지 못한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공포스러운 스릴러로 경험된다. 이후 이 촬영물을 찍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초반의 경험은 송두리째 뒤집어진다. 그럴듯한 공포감을 주었던 영상과 그것을 제작하는 현실 간의 우스꽝스러운 불일치를 이 영화는 유머의 소재로 삼고 있다.

위의 두 사례는 재현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일깨워준다. 그 어떤 재현도 날것의 현실을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다는 점에 비추었을 때, 재현의 폭력에 대한 논의는 폭력에 대한 논의에 영원히 미달할 것이다. 재현의 윤리를 점검함으로써 현실의 윤리 또한 재정립되리라는 믿음은 재현과 현실의 교집합 너머에 자리한 누군가에게는 비윤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이 현실을 장악하다 못해 착취하는 형세가 공고해져감에 따라 저 믿음 또한 점점 간과할 수 없게 되어간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폭력이 벌어진 ‘사실’마저도 현실의 경험이 아닌 재현의 소비를 통해 접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려 이에 대한 자각과 성찰 또한 실종되고 있다. 재현이 곧 현실이 될 수는 없지만 재현과 현실의 교집합은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믿음의 실천만큼이나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항상 의식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책을 덮는 순간, 티브이를 끄는 순간,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허무처럼 찾아오는 현실을 그 무엇보다도 더 붙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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