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최근 한 래퍼의 부모가 20여년 전 주변 친지들을 연대보증 세워 거액의 대출을 받은 뒤 야반도주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사건의 세부적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해당 사건이 대중의 공분을 산다는 점이 나에게는 묘한 쾌감을 주었다. 우리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선진국인 서방으로 이민한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뒤, 이민국의 세련된 이미지를 후광 삼아 얻는 인기의 한 민낯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민이 위와 같은 파렴치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채 성장해온 기형적 사회를 탈출할 가장 실질적인 방안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이민을 선택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이민의 역사는 유구하기 그지없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였기에 선망의 땅으로 여겨졌던 미국으로, 물가의 차이에 근거한 풍요를 노리고 동남아로, 선진적인 복지를 누리기 위해 북유럽으로. 한없이 척박하여 이웃과 함께 바로잡아가기에는 막막하기까지 한 이 고장난 사회를 벗어날 명분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몇년 전 유행하여 지금까지도 유효한 ‘헬조선’ 담론이 ‘탈조선’으로 통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한 게임의 지도를 응용하여 재치 있게 작성된 헬조선의 지옥도는 다음과 같다. 출생과 동시에 ‘헬게이트’가 열리고, ‘노예 전초지’를 거쳐 ‘대기업 성채’에 입성하기 위한 노정이 예견되어 있다. 이 고난의 행로를 비웃듯이 ‘정치인의 옥좌’와 ‘금수저 무기고’가 양옆에 표표히 자리하고 있다. 성채에 입성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낙오하여 ‘백수의 웅덩이’에 빠지거나 ‘자영업 소굴’에 끌려갈 것이다. 그런데 이 지옥의 무한루프 바깥에 구원의 북극성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미지의 영역이 있으니, 다름 아닌 ‘이민의 숲’이 그것이다. 이 웃지 못할 풍자적 사회상은 너무나 현실적인 한편으로 사회에 대한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 또한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미친 사회를 벗어날 궁리는 해도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도모할 상상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런 순진한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미친 짓으로 여겨지는 곳, 혹은 그렇게 여겨지도록 우리를 만들어온 곳이 바로 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고회로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무의식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를 계속해서 기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족쇄라면, 이민의 숲을 동경하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쥐고 있는 패가 자신을 옥죄는 칼인 줄을 모르는 꼭두각시의 모습이지는 않을까? 자국에서 이득만 취한 뒤 이국으로 날아가 꿀을 빨며 자국에서 져야 할 책임은 회피함으로써 이 나라를 천천히 파산시켜온 기득권의 태도를 선망하고 또 모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한 래퍼 일가에 대한 뉴스는 이 해묵은, 그러나 결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상기시켜줌으로써 달콤한 탈출구로 여겨져왔던 ‘이민의 숲’의 실체를 희화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착취하는 ‘정치인의 옥좌’나 ‘금수저 무기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곳은 복지의 천국이고 이곳은 기득권의 천국일지라도, 그곳을 탐하기보다 이곳을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갖고 살아가는 민주시민임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칼럼 |
[2030 잠금해제] 이민의 숲을 탐하지 말지어니 / 이은지 |
문학평론가 최근 한 래퍼의 부모가 20여년 전 주변 친지들을 연대보증 세워 거액의 대출을 받은 뒤 야반도주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사건의 세부적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해당 사건이 대중의 공분을 산다는 점이 나에게는 묘한 쾌감을 주었다. 우리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선진국인 서방으로 이민한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뒤, 이민국의 세련된 이미지를 후광 삼아 얻는 인기의 한 민낯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민이 위와 같은 파렴치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채 성장해온 기형적 사회를 탈출할 가장 실질적인 방안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이민을 선택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이민의 역사는 유구하기 그지없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였기에 선망의 땅으로 여겨졌던 미국으로, 물가의 차이에 근거한 풍요를 노리고 동남아로, 선진적인 복지를 누리기 위해 북유럽으로. 한없이 척박하여 이웃과 함께 바로잡아가기에는 막막하기까지 한 이 고장난 사회를 벗어날 명분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몇년 전 유행하여 지금까지도 유효한 ‘헬조선’ 담론이 ‘탈조선’으로 통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한 게임의 지도를 응용하여 재치 있게 작성된 헬조선의 지옥도는 다음과 같다. 출생과 동시에 ‘헬게이트’가 열리고, ‘노예 전초지’를 거쳐 ‘대기업 성채’에 입성하기 위한 노정이 예견되어 있다. 이 고난의 행로를 비웃듯이 ‘정치인의 옥좌’와 ‘금수저 무기고’가 양옆에 표표히 자리하고 있다. 성채에 입성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낙오하여 ‘백수의 웅덩이’에 빠지거나 ‘자영업 소굴’에 끌려갈 것이다. 그런데 이 지옥의 무한루프 바깥에 구원의 북극성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미지의 영역이 있으니, 다름 아닌 ‘이민의 숲’이 그것이다. 이 웃지 못할 풍자적 사회상은 너무나 현실적인 한편으로 사회에 대한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 또한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미친 사회를 벗어날 궁리는 해도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도모할 상상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런 순진한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미친 짓으로 여겨지는 곳, 혹은 그렇게 여겨지도록 우리를 만들어온 곳이 바로 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고회로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무의식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를 계속해서 기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족쇄라면, 이민의 숲을 동경하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쥐고 있는 패가 자신을 옥죄는 칼인 줄을 모르는 꼭두각시의 모습이지는 않을까? 자국에서 이득만 취한 뒤 이국으로 날아가 꿀을 빨며 자국에서 져야 할 책임은 회피함으로써 이 나라를 천천히 파산시켜온 기득권의 태도를 선망하고 또 모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한 래퍼 일가에 대한 뉴스는 이 해묵은, 그러나 결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상기시켜줌으로써 달콤한 탈출구로 여겨져왔던 ‘이민의 숲’의 실체를 희화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착취하는 ‘정치인의 옥좌’나 ‘금수저 무기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곳은 복지의 천국이고 이곳은 기득권의 천국일지라도, 그곳을 탐하기보다 이곳을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갖고 살아가는 민주시민임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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