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은 ‘입시 스릴러’답게 사교육에 사활을 거는 상류층 가정의 모습을 살벌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대에 합격한 이웃집 아들의 포트폴리오를 얻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여는가 하면, 아이의 성적부터 내신까지 맞춤형으로 관리해주는 코디를 고용하기 위해 강남 아파트 한채 값을 투척하고, 자녀의 방에 독서실 책상을 들여놓거나 방음실을 갖추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지극히 ‘리얼’하기 때문이다. 소위 ‘스카이’로 대변되는 입시경쟁의 상징 질서를 그야말로 천륜으로 섬기는 성안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대학입시라는 해묵은 경쟁신화를 떠받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극중 이수임(이태란 분)이 캐슬 내부의 과열화된 사교육에 경각심을 일깨우려 분투하는 모습은 공감을 얻기는커녕 외려 오지랖의 전형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 그 또한 단지 사교육을 하지 않았을 뿐, 명문고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번듯한 아들을 두고 있는 것이다. 캐슬의 비판적 외부자를 자처하는 이수임의 가족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듯이 이미 문제는 사교육이 아니다. 공교육 사교육 할 것 없이 교육이 곧 입시라는 거대한 경쟁 시스템으로 간주되어온 것이 문제다. 입시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아야만 인간으로 기능할 최소한의 자격이 부여되도록 조장되어온 사회에서 사교육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것은 더는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리얼하다. 교육은 입시에 성공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입시를 선뜻 포기할 수는 없기에 입시지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즉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적하는 것은 이 사실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극중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수임이 지적하는 점, 즉 과도한 사교육이 아이들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캐슬의 부모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식의 장래가 불행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혹은 이게 정말 옳은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구나 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비단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회 곳곳이 얼마나 뿌리 깊이 망가져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잘 안다고 해서 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수임의 분투가 한낱 오지랖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고장 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이 없는 우리의 곤경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시간강사법도 마찬가지다.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 외려 대학본부에 강사진을 구조조정할 좋은 빌미를 쥐여준 꼴이 되었다. 대학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보다는 물질적·상징적 자본 축적에 열을 올리는 거대한 시장으로 전락한 현실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십수년간 대학의 시장화를 방임하여 시간강사를 멸종위기종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보호종으로 지정해보았자 교육생태계를 정화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얄팍한 실천과 처방은 없느니만 못하다. 해법의 모색은 오랜 시간을 들여 깊이 논의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칼럼 |
[2030 잠금해제] 고장 난 사회, 길 잃은 교육 / 이은지 |
문학평론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은 ‘입시 스릴러’답게 사교육에 사활을 거는 상류층 가정의 모습을 살벌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대에 합격한 이웃집 아들의 포트폴리오를 얻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여는가 하면, 아이의 성적부터 내신까지 맞춤형으로 관리해주는 코디를 고용하기 위해 강남 아파트 한채 값을 투척하고, 자녀의 방에 독서실 책상을 들여놓거나 방음실을 갖추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지극히 ‘리얼’하기 때문이다. 소위 ‘스카이’로 대변되는 입시경쟁의 상징 질서를 그야말로 천륜으로 섬기는 성안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대학입시라는 해묵은 경쟁신화를 떠받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극중 이수임(이태란 분)이 캐슬 내부의 과열화된 사교육에 경각심을 일깨우려 분투하는 모습은 공감을 얻기는커녕 외려 오지랖의 전형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 그 또한 단지 사교육을 하지 않았을 뿐, 명문고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번듯한 아들을 두고 있는 것이다. 캐슬의 비판적 외부자를 자처하는 이수임의 가족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듯이 이미 문제는 사교육이 아니다. 공교육 사교육 할 것 없이 교육이 곧 입시라는 거대한 경쟁 시스템으로 간주되어온 것이 문제다. 입시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아야만 인간으로 기능할 최소한의 자격이 부여되도록 조장되어온 사회에서 사교육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것은 더는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리얼하다. 교육은 입시에 성공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입시를 선뜻 포기할 수는 없기에 입시지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즉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적하는 것은 이 사실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극중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수임이 지적하는 점, 즉 과도한 사교육이 아이들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캐슬의 부모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식의 장래가 불행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혹은 이게 정말 옳은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구나 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비단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회 곳곳이 얼마나 뿌리 깊이 망가져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잘 안다고 해서 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수임의 분투가 한낱 오지랖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고장 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이 없는 우리의 곤경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시간강사법도 마찬가지다.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 외려 대학본부에 강사진을 구조조정할 좋은 빌미를 쥐여준 꼴이 되었다. 대학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기보다는 물질적·상징적 자본 축적에 열을 올리는 거대한 시장으로 전락한 현실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십수년간 대학의 시장화를 방임하여 시간강사를 멸종위기종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보호종으로 지정해보았자 교육생태계를 정화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얄팍한 실천과 처방은 없느니만 못하다. 해법의 모색은 오랜 시간을 들여 깊이 논의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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