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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3 18:07 수정 : 2019.03.03 19:32

이은지
문학평론가

최근 유행의 중심에는 ‘복고’가 자리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힙플레이스로 떠오른 을지로와 익선동에는 디저트 카페 등으로 탈바꿈한 낡은 상가와 한옥이 즐비하다. 휴대전화에 장착된 최첨단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고화질의 사진들은 갖가지 앱을 통해 광택이나 흠집 등을 입히는 수고를 거쳐 필름사진과 비슷한 외양으로 거듭난다. 디지털로 작업되는 고음질의 음악들은 아날로그 음악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잡음을 의도적으로 넣어 ‘로파이’(Lo-Fi)를 연출한다.

낡은 것에 대한 향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지만 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바야흐로 ‘낡음’ 자체가 상품이 되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낡음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낡음이 희소해져 그에 대한 수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낡음이 희소해질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상품들이 대량으로 생산됨에 따라 낡음을 허용할 새도 없이 팔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복고 열풍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것, 기만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생산되는 상품들은 과거에 비해 그 질이 현격히 떨어져 금방 폐기하고 다시 사야 마땅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휴대전화는 약정 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고장 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알량한 신기술을 감질나게 업데이트한 신제품이 출시된다. 그나마 멀쩡한 물건들도 같은 듯 다른 유행에 휩쓸려 금세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낡음을 허용하지 않는 이 거대하고 체계적인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낡음을 모사한 상품들을 소비할 때만 낡음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새로운 낡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단지 입맛에 맞는 낡음을 향해 지갑을 활짝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낡고 반짝이는 것은 상품이 아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복고 상품이 내뿜는 가짜 낡음으로부터 잠시 눈을 돌려 그리 멀지 않을 우리의 기억 속을 더듬어보자. 책상 한가운데 금을 긋거나 책가방으로 벽을 세워 영역 다툼을 할지언정 자가 주택에 살건 임대주택에 살건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학창 시절, 옆집에 누가 살건 따뜻한 이사 떡을 서슴없이 나누고,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반상회를 하던 시절 말이다.

상품으로 판매되고 소비되는 낡음의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 있던 이 기억들이야말로 우리가 그 무엇보다 그리워해야 할 낡음이 아닐까. 나아가 이 낡음이야말로 그리워하는 가운데 다시금 복원하기 위해 노력할 만한 것은 아닐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지금보다 좀 더 인간적이었던 풍경들을 돌이켜보는 것, 그러한 풍경을 오늘날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지 각자의 삶에 비추어 짚어보는 것, 그 풍경을 오늘날에도 가능하게 하려면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좋을지 고민해보는 것, 이 고민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상상해보는 것.

낡음에 대한 향수에는 이러한 행위의 연쇄를 촉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향수를 통해 과거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현재에 다시 경험된다. 상품화된 낡음을 향해 지갑을 여는 행위는 이러한 가능성마저 휘발시킨다. 그러나 지갑을 여는 행위에서도 하나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소비와 연관된 것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지갑을 열 때마다 실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부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찾아오는 실감의 홍수에 마비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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