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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7 18:12 수정 : 2019.04.10 15:02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최근 원주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아동 유괴 미수 사건이 아이의 거짓말로 밝혀졌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 엄마에게 혼날까봐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해프닝에 그친 것에 안도하는 한편 아이의 거짓말을 질책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 뉴스를 보면서 영화 <더 헌트>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루카스에게 한 아이가 이성으로서 호감을 표시하자 루카스는 아이를 잘 설득하여 거절한다. 상처를 받은 아이는 루카스가 자신을 성추행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거짓으로 지어내고, 루카스는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된다.

위의 두 사례에 공통되는 것은 아이가 자신이 처한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냈다는 점이다. 아이의 거짓말에는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겪게 될 처벌이나 상처에 대한 불안을 봉합하려는 욕구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그 거짓말은 제법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는 비단 아이에게만 해당될까?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즘의 참상 이후 문명사회를 전면 재고한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합리성이란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지극히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진단한다. 예컨대 자연 앞에 내던져져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는 까닭을 모르고 불안에 떨던 인간은 밤의 신을 발명하고, 이를 통해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구하게 된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근대사회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파괴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이처럼 이성이 비합리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일상적으로도 종종 겪는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서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 합리화하곤 한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은 이러한 ‘자기합리화’의 쓸쓸한 귀결을 보여준다.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궁핍하게 지내는 어린 노찬성은 할머니가 일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노견 에반을 데려다 기르게 된다. 에반의 상태가 좋지 않자 동물병원에 데려간 찬성은 에반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락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된 알바를 하여 돈을 모은다.

병원을 다시 찾은 날 하필 문이 닫혀 있어 돌아오는 길, 수중의 돈은 할머니가 얻어다준 스마트폰을 개통하는 데, 금이 간 액정에 필름을 붙이는 데 조금씩 헐다보니 어느덧 부쩍 줄어 있다. 찬성은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다시 액수를 채울 사흘 동안만 에반이 기다려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도 품어본다. 그러나 이틀째 되는 날 사라진 에반은 (추정컨대) 고속도로에 스스로 뛰어들어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의 미덕은 누구도 찬성의 행동을 선뜻 질책할 수 없도록 그려낸 데 있다. 에반을 위해 찬성이 감행한 노력은 기특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몇 푼의 달콤한 물욕에 무너진 것을 질책하기에는 찬성의 처지 또한 가혹하다. 어떠한 가치판단도 무색해지는 지점에서 소설은 단지 우리의 알량한 본성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곤 하는지 말없이 돌아보게 한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작동할 뿐 우리 모두에게 은밀히 내재해 있어 누구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본성 말이다. 이와 같은 점을 헤아린다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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