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가 조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울산시 방어진체육공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직장 내 따돌림, 비방 현수막, 미행, 업무 변경 등 현저한 직장 스트레스가 우울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에게 산재요양 판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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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 이야기
▶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가? 1997년 외환위기의 기억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민주노조가 스러지고 비정규직이 공장의 절반을 채워간 20여년 세월을 현대미포조선의 노동자 김석진씨가 뚫고 왔다. 인터뷰 내내 김석진씨는 기력이 없었다. 그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노동운동의 상처로 보였다. 회사 명예훼손·명령 불복종으로입사한 지 17년 만에 해고
하지만 노사 무쟁의 결의대회에
반대한 괘씸죄가 진짜 이유 1·2심서 부당해고 판결 뒤
회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 선임
대법에서 3년 이상을 끌다
8년3개월 만에 공장으로 돌아와 현대미포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지난 6월 수주잔량 기준으로 세계 7위(국내 6위)의 조선소를 한쪽에선 ‘산업 평화의 모범 사업장’으로, 다른 한쪽에선 ‘비정규직의 집합소’로 부른다. 지난달 23일 울산에서 만난 현대미포조선의 한 정규직 노동자에게 조선소 내 사내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공중에서 철근이 떨어져 사내하청 노동자 무릎에 맞았어요. ‘악’ 소리가 들렸죠. 그런데 그 친구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더라고요. 하청노동자가 다치면 회사 응급차도 안 와요. 그 사람도 트럭을 타고 나갔죠.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산재 내면 잘린다고 생각해서 병원 가는 것도 꺼려요. 파리 목숨이에요.” 대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율이 많아질수록,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훼손될 가능성은 커진다. 그리고 더 많은 파이를 가져가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반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내 조선산업의 경우 이미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지난해 민간 연구기관인 경제개혁연구소의 위평량 연구원이 국내 조선산업 사업자 7곳과 중소 하도급(사내하청) 기업 466곳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0년에서 2010년까지 사내하도급 노동자의 증가율은 정규직의 6배에 이르렀다. 또한 최근 4년 동안의 사내하도급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1.3배 많았다. 현대미포조선은 울산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업장이다. 1997년 이후 16년 연속 노사 무분규의 길을 걸었다. 반면 이 회사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 김석진(51)씨는 15년째 ‘부당해고 관련 투쟁’을 벌이고 있다. 8년은 복직 투쟁을 하느라 나머지는 해고기간 임금 가산금을 받기 위해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회사의 감시와 미행, 동료들의 ‘왕따’를 받았다. 동료들은 김씨를 비난하는 펼침막도 걸었다. 우울증을 앓게 된 김씨는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부터 ‘산재요양’ 판정을 받았다. 그는 조선소 내 비정규직을 옹호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겨레>는 김씨에 대한 직장 내 따돌림 양상이 구체적으로 담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재해조사서를 입수했다. 위원회는 회사와 직원들이 그를 미행·감시한 사실과 직장 내 따돌림, 추가근무 배제, 업무 변경 등의 사실을 확인하고 산재요양 결정을 내렸다. 노동운동 활동가에 대한 직장 내 따돌림과 이로 인한 산업재해(우울증)를 국가기관이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과 정규직화를 위해 헌신했다며 김씨에게 제8회 박종철인권상을 안겼다. 지난달 24일 현대미포조선이 내려다보이는 울산 방어진체육공원 산자락에서 그를 만났다. 우울증 알약을 먹고 나온 그는 다섯 시간의 인터뷰 뒤에 바람을 쐬어야 건강에 좋다며 산으로 걸어갔다. 재해조사서에 실린 일부 내용과 그의 인터뷰를 옮긴다. 비정규직 해고자를 도운 정규직 -1980년에 현대미포조선에 입사했다. “경북 월성이 고향인데 고등학교를 울산공고로 왔다. 졸업하고 바로 현대미포조선에 용접공으로 들어왔지. 80년대만 해도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이 바리캉(이발기)을 들고 서 있었다. 나도 한번 머리가 깎인 적이 있고….” -현대미포조선에서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가 생겼나? “그해 노조가 결성됐다. 나는 조직부 차장에 이어 초대 체육부장을 했다. 파업 때엔 춤 배워와 가르치고 정당방위대도 만들고… 그런 활동을 했다. 94년부터 97년까지 네 차례 대의원을 했고 96년에는 ‘민주노동자동지회’라는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현장조직이 뭔가? “노조 집행부를 견제, 견인하고 노동운동 활동가를 단련시킨다. 그러다가 97년에 상사 명령 불복종과 회사 명예훼손의 이유로 해고됐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해 연말에 무쟁의 무분규 내용을 담은 노사화합 결의대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거기에 내가 강력히 반대했다. 나는 그때부터 민주노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해고됐는데 노조가 도와주지 않았나? “당시 노조 간부가 와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더라. 현장조직 해체, 대의원 사퇴, 노조활동 포기 각서 작성 등을 하면 정직 정도까지 낮출 수 있다는 거다. 회사가 시켜서 온 건 아니고 중간 다리 정도로 온 거지. 그런데 그런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받으면 안 되잖아. 사비를 들여 소송을 시작했다. 1심과 2심 법원 모두 해고할 만한 사유가 안 되는 ‘과잉징계’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은?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안 나는 거다. 민사소송법 199조를 보면, 대법원이 다섯 달 안에 판결해야 한다. 대법원에서는 사실 심리는 안 하고 법리 심리만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당시 회사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새로 선임한 상태였다. 1년, 2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고… 기다리다 지쳐 2005년 1~2월, 6~7월 대법원 앞에서 ‘판결 빨리 내려달라’고 1인시위를 했다. 변호사가 그러더라. 최대한 판결을 늦추는 게 회사 전략인 거 같다고. 내가 당시 회사 앞에서도 1인시위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비들과 충돌이 발생하면 또 해고 사유가 생기니까….” -결국 대법원이 재판을 열었나?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의 제작 과정에서 대법원이 선고일을 밝혔다. 2005년 7월22일에 최종적으로 해고 무효 판결이 났다. 고법 판결이 나고 3년5개월이 걸렸다.” 그해 8월9일 그는 시설장비반으로 원직 복직됐다. 8년3개월 만에 돌아온 공장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겪은 한국 사회는 안정을 희구했고, 공장은 점점 ‘사내하청 기지’가 되어갔다. 김씨는 다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해 말 노조 위원장 선거에 뛰어든 그는 결선투표에서 최종 낙선했다. 김씨를 만나기 전날에 만난 그의 동료는 “그때 김석진씨가 결선투표까지 가는 것을 보고 회사가 무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초점은 무엇이었나? “이미 현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가 절반에 육박하고 있었다. 2008년 사내하청업체인 용인기업 노동자 30여명이 부당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현대미포조선의 (정규직 직접고용) 노동자와 지위가 같은지 가려달라는 ‘종업원 지위 확인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지위가 같지 않다는 고법 판결을 뒤엎고 파기환송했다. 그런데 또 시간이 길어질 것 같더라. 그해 9월 나를 포함한 정규직 15명이 나섰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에 식당과 정문 앞에서 회사는 재판을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복직시키라고 선전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은 1개월 정직을 받았고 또 한 명은 목을 매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밖에서 싸우고 우리 정규직들은 안에서 싸웠지.” 심야테러당한 뒤 정직… 그 뒤 투명인간이 되다 -일부는 굴뚝에 올라가 점거농성을 벌였던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수석부본부장과 정규직 활동가 한 명이 올라갔어. 아래에는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다. 영남노동자대회를 마친 2009년 1월17일 밤이었다. 조승수 의원을 비롯해 진보신당 단식농성자 등 10여명이 천막 안에 있었다. 그런데 밤 11시30분께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 50~60명이 쇠파이프와 각목, 소화기를 들고 쳐들어왔다. ‘와’ 하는 소리를 내며 전경들을 밀어내고 들어왔어. 아마 전경들도 맞았을 거야. 나는 각목으로 맞았는데, 깨어나보니 울산대병원 응급실이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였나? “현대중공업 경비들이었다.”(현대미포조선과 현대중공업은 실질적 주주(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가 같은 형제 기업이다.)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검찰이 현대중공업 경비들을 기소하면서 적용한 혐의는 ‘기물손괴죄’였다. 시위용품을 부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김씨와 진보신당 당원들은 누가 때렸는지 가릴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았다.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을 경우에는 통상 ‘공동정범’으로 기소가 가능하다. 김석진씨는 이 일로 현대미포조선에서 두 달 정직을 당한다. 그사이 현대미포조선 사쪽과 정규직 노조는 용인기업 해고노동자 문제를 합의하고 이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 하지만 김씨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회사에서 미행을 했다고? “거의 매일 집 근처로 현대미포조선 잠바를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감시했다. 내가 차를 몰고 나가면 차가 따라왔다. 그래서 현대자동차 노조 영상팀에 부탁해 당시 상황을 촬영했다. 울산32누 133×… 현대미포 차량이었다.” 이에 대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차량 세 대가 현대미포조선 총무부 차량이었다며 “회사 노무관리 직원들이 신청인의 자택 주변을 감시하고 차량을 이용해 신청인을 미행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2009년 5월16일 김씨는 다시 출근을 했다. 충격적인 현장을 목도했다. 동료들 명의의 낯선 펼침막이 그가 일하는 현장사무소에 걸린 것이다. ‘우리 삶의 일터를 망하게 하는 자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 며칠 뒤에는 이런 펼침막도 붙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기만과 거짓… 내 일터 말아먹으려는 자, 당신을 규탄한다’. 그날부터 김석진씨에게 공장은 ‘지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하루 일과를 설명해달라. “아침 7시20분에 공장 후문에 도착한다. 그러면 경비들이 3~4m 뒤에서 따라붙는다. 그렇게 1.5㎞를 걸어 비난 현수막이 걸린 현장사무소에 도착한다. 젊은 친구들도 본 체 만 체 하고… 아무도 인사를 안 한다. 오전 8시에 업무를 배정받는다. 나에게는 시설물 보수 작업이 떨어진다. 이를테면 녹을 없애고 페인트칠을 하는 일이다.”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자동차 공장과 달리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건조중인 대형 선박을 찾아다니며 대개 일주일 단위로 업무를 배정받는다. 반장이 업무를 나눠주면 조별로 업무를 받고 움직인다. 김씨의 동료는 “김석진씨 같은 고참한테 추울 때 난간을 수리하라고 한다든지 신입사원이 하는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동료들과 말을 안 하나? “첫 출근 이후로 말을 잘 안 건다. 점심때는 조장이 따라오고… 어디를 가면 항상 따라온다. 왜 따라오냐고 하면 안전사고 방지 차원에서라고 한다. 밥 먹을 때도 먼발치에 앉아서 먹는 거 쳐다보고 있고. 3년 가까이 이 짓을 했다.”
인터뷰를 마친 김석진씨(오른쪽)가 산에서 내려가고 있다. 한때 현대미포조선 노조위원장 선거의 결선투표까지 진출한 노동운동가였지만, 지금은 직장 내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앓는 노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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