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특집
2017년과 세계
▶ 2017년. 누구는 민주화운동 30년으로, 또 누구는 박정희 100년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시야를 확장하면, 지구촌의 2017년은 다른 얼굴로 다가올 수도 있다. 10년, 100년, 500년 전의 과거는 2017년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을까? 금융위기와 러시아혁명, 종교개혁 세 개의 열쇳말을 통해 2017년의 ‘현재적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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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가 한창인 2008년 1월22일 뉴욕상업거래소의 원유중개인들이 거래가격을 외치고 있다. 이날 원유가격은 미국 경제의 급속한 침체 우려가 커지며 폭락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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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있다
밝아오는 2017년은 2007~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되는 해다. 미국·영국 등 몇몇 선진국을 중심으로 촉발된 위기는 해당국들의 발빠른 대응 덕에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지만, 대신 세계 경제 전체를 깊은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그 과정에서 전세계 다수 대중이 고통을 받았다. 물론 긍정적인 수확도 거두었다.
표면적으로 이 위기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가 부실화하면서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 ‘닷컴버블’ 붕괴와 9·11 테러 등의 악재로 고전하던 미국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난해 우리의 최경환 경제팀이 들고나온 것과 비슷한, 저금리를 통한 주택시장 활성화 정책을 편다. 이에 따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까지 주택시장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모기지 시장에서 5%에 지나지 않았던 서브프라임모기지가 2004년엔 20% 가까이 치솟는다. 그러나 2004년 미국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끝내면서 주택시장 거품은 꺼지기 시작했다. 금리 상승에 따라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이들은 당연하게도 신용이 낮고 형편이 어려워 서브프라임모기지론으로 무리하게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이었다.
주택가격 폭락에서 세계경제위기로
사람만 파산한 게 아니다. 그들에게 대출해준 금융기관들도 (부분적으로는 담보로 잡은 주택의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무너졌다. 특히 2007년 4월2일,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업계 2위인 뉴센추리파이낸셜의 파산신청은 이후 대형 금융기관의 잇따른 파산·구제금융 신청 행렬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편 서브프라임모기지 회사들은 위험회피를 위해 자신들의 채권을 증권화해 다른 금융기관에 판매했고, 이렇게 판매된 상품은 또다시 새로운 파생금융상품으로 거듭나 재판매되곤 했다. 주택시장의 작은 흔들림이 금융시스템 전체를 출렁거리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2008년 9월 이른바 ‘빅5’에 드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선언한 것은 그 중요한 결과다. 이렇게 위기는 경제의 전 부문으로, 나아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2007~08년 금융위기는 미국, 영국, 유럽 등 선진경제권에서 국가가 부실금융상품을 대거 구매(양적완화)함으로써 잦아들었으나, 이후 전세계적인 경제침체를 불러왔다. 선진국 경제가 침체되는 바람에 선진국에 상품을 공급하는 개발도상국 경제에 대한 수요가 줄었고, 이는 또다시 자원생산국들까지 침체에 빠뜨린 것이다. 그 결과 세계 경제의 성장률은 2010년 이후 올해까지 6년 연속 낮아지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1930년대 대불황(Great Depression)에 빗대 대침체(Great Recession)라고 부른다. 한편 이 과정에서 몇몇 나라들은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기도 했다. 세계 금융시스템에 깊숙이 연결된 탓에 금융위기의 충격은 크게 받았으나 그에 대응할 국가능력은 부족한 유럽의 주변국들(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이 그 대표적인 희생양들이었다. 말하자면 2007~08년 금융위기는 일부 선진국에서 금융업종의 무절제와 탐욕으로 발생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비용은 전세계 모든 국민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금융위기는 전세계 민중에게 엄청난 고통과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고 있지만, 그것이 남긴 긍정적인 유산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경제위기들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취급되곤 했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금융위기는 이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불완전하게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007~08년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그것도 현대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 부문에서 터졌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변명’이 불가능했다. 탐욕스럽고 뻔뻔한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으로 2009년 런던에서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2011년에는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덕분에 한동안 지리멸렬했던 좌파 정당들이 독일과 남유럽에서 약진해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슬로건을 앞세운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킨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경제학자들과 정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으로는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외부충격에 대한 ‘맷집’을 키우는 규제체제(예: ‘바젤 Ⅲ’)가 세계 경제 차원에서 도입됐고, 국민경제 차원에서도 각국 사정에 맞게 금융감독체계 정비가 이뤄졌다(예: 한국은행에 ‘금융안정’ 책무 부여). 이러한 흐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입장 변화일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설립 이후 줄곧 발전도상국의 경제정책 결정에 개입했는데, 특히 1980년대 이후엔 구제금융을 미끼로 금융 개방·자유화, 작은 정부, 규제완화 같은 ‘신자유주의’ 교리 전파에 앞장서 왔다. 그랬던 국제통화기금이 최근 들어 불평등 심화 같은 금융화의 폐해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 필요성 등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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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99%여, 단결하라!’ 2012년 5월1일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 브로드웨이에서 ‘월가 점령운동’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122돌을 맞은 ‘국제 노동자의 날’을 기리는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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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의 ‘변신’에서도 나타나듯이, 2007~08년 위기는 국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 전세계적 각성을 촉구했다는 의미도 있다. 1990년을 전후해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세계적으로 ‘작은 정부’ 기조가 지배적이었다.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세기 전환기에 집권에 성공한 유럽의 좌파 정권들조차 그런 기조를 앞장서 내세웠다. 그러나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없었더라면 10년 전 위기는 경제 전체의 파국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2007년 파산 위기에 처한 영국의 모기지 회사 노던록을 국유화하라고 종용한 게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우파 성향의 경제지였고, 2008년 미국에서 총 7천억달러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TARP)을 결정한 것은 공화당의 부시 정부였다. 더 이상 국가의 적극적 역할 인정 여부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시금석이 아니게 된 것이다.
재주는 샌더스가, 열매는 트럼프 손에
이상과 같은 금융위기의 긍정적 유산은 인류의 삶을 한 걸음 진보시킬 잠재력을 지녔지만, 그동안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만은 않았다.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미국 대중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촉발한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라는 깨달음은 외국인 혐오와 같은 감정과 결합해 저 ‘체제’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데려다 놓았고, 국가의 과감한 경제적 역할은 다수 대중의 복지 증진을 위해 발휘되기보다는 파산한 금융시스템을 살리는 비용을 그것을 파산에 이르게 한 데 책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지불하게 만드는 데 악용됐다. 위기 촉발 직후에는 너나없이 앞다퉈 ‘반성문’을 써대던 경제학자들도 어느샌가 ‘경제학이 잘못했다’에서 ‘경제학은 문제없고 정책만 조금 잘했어도 위기를 피했을 것이다’라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우리는 거기에서 값진 교훈을 얻었지만, 아직은 교훈이 긍정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이 교훈들이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개선하고 인류의 삶을 한 걸음 진보시키는 데 기여하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대중의 각성된 의지가 공공연히 표출되어야만 한다. 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촛불의 함성도 바로 그런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은 이 촛불이 앞장서 우리 경제를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간이 되길 빌어 본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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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을 승리로 이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 서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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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서 싸워라.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번 겨울 의문이 하나 풀렸다. 유럽 근대사의 혁명들은 대부분 봄과 여름에 발발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1830년 혁명, 1871년 파리코뮌, 1968년 청년봉기가 모두 5월에서 7월 사이에 일어났다. 그에 비해 1917년 러시아혁명은 2월에 발발했다. 러시아의 2월은 매우 춥다. 매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당시 러시아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 11월과 12월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에 나서 본 사람은 안다. 분노는 높았고 마음은 절박했다. 추운 날씨에도 시위를 하러 거리에 나설 때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만이 아니라 단호한 결기를 따로 챙긴다. 여름보다 겨울의 혁명이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곧 봄이 오지 않는가?
1917년 2월23일 여성 노동자와 주부 수천명이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빵 배급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그들은 절박했고 단호했다. 다음날에는 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을 포함해 20만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3월1일이 되자 병사 17만명도 가세했다. 3월2일 의회 두마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됐고, 3월3일 결국 차르 니콜라이2세가 퇴위했다. 임시정부와 별도로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평의회)를 조직했다. 이른바 이중권력 체제가 등장했다. 시위 발발 12일 만에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지난 몇 주일 동안 토요일마다 연인원 1천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였지만 ‘박2세’는 ‘퇴위’는커녕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것에 견준다면, 100년 전 러시아 2월혁명의 가속성은 놀랍다. 그 뒤 10월까지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진행도 역동적이긴 마찬가지다.
혁명은 계획한다고 불붙지 않는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 급진화의 동력은 모두 대중에게서 나왔다. 스위스에서 급히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방침을 세우기 전까지는 대중의 혁명적 분출을 이해하는 정치세력이 없었다. 임시정부의 신사들은 선거와 의회를 내세우고 법의 지배를 옹호했지만, 민중의 기대는 그것을 능가했다. 임시정부가 전쟁을 지속하자 병사들은 평화를 외치며 정부에 총부리를 겨눴고, 노동자들은 경제상황 악화와 실질임금 하락을 유산자 계급을 떠받치는 정부의 무능력으로 이해했다. 농민들은 즉각적인 개혁으로 토지를 갖기를 원했다. 민중들은 모두 정의롭지 못한 구체제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배계급의 무능력에 대한 불만을 계급적 분노와 요구로 조직했던 것이다. 게다가 7월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반혁명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자극했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파업과 시위를 더 강력히 조직하며 결속했다. 이때 국민적 통합과 질서를 요구하는 정부와 온건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레닌과 볼셰비키는 대중운동의 급진화에 조응하며 그것을 더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요컨대 정통주의 해석의 주장과는 달리 권력욕에 불타는 볼셰비키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거나 소수의 음모를 통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군대와 공장의 투사들은 도시 지역의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볼셰비키를 강력히 옹호했던 실질적 혁명군들이었다. 1917년 10월24~25일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것은 대중의 급진적 분출과 볼셰비키의 탁월한 현실 인지와 기민한 실천의 결합이었다.
새삼 레닌의 혁명이론과 볼셰비키의 조직 원리에서 무언가 배울 것을 찾자는 소리는 진부하다. 트로츠키의 명언, “진정한 혁명 정당의 첫번째 특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만 기억하자. 혁명은 혁명가들이 계획한다고 불붙지 않는다. 대중의 요구와 이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민주주의적 분출의 방식과 자발적 조직의 형식을 창의적으로 확대하는 것만이 러시아혁명의 현재적 함의이자 미래를 위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혁명의 정률을 찾는 것보다 혁명의 동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당시 수백만명의 러시아 민중은 삶의 불만을 표출하고 집단적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 아울러 그들은 사회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대의를 위해 거리와 공장과 막사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단지 의회나 선거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줬고 세상이 더 공정하고 평등하게 근본적으로 새롭게 조직될 수 있음을 과시했다. 그래서 “10월혁명의 꿈을 평생 간직”했던 한 역사가의 호소는 설득력 있다. 20세기 가장 탁월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회고록 <미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끝맺음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의 발화자가 홉스봄이란 사실에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비판적 역사가 토니 주트는 “21세기에 무엇인가 이로운 일을 하려면 우선 20세기에 관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홉스봄은 악을 직시하기를 거부했고 악을 악이라 부르기를 거부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공산주의자 홉스봄과 달리 사회민주주의 좌파 지향의 주트는 러시아혁명의 모순과 20세기 공산주의 만행에 진지하고 전면적으로 대결하기를 촉구했다. 주트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 진보의 거대담론과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사회정의의 기획이 없는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면, 이는 대체로 레닌과 그 후계자들이 우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라고 쏘았다. 홉스봄에게 10월혁명과 소련 공산주의는 희망의 북극성이었지만, 주트에게 그것은 “급진파의 유산을 모독하고 약탈”한 과정이었다. 2월혁명과 10월혁명에서 발현된 대중들의 급진주의와 아래부터의 활력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파괴된 또 다른 역사를 빼고서 혁명의 낭만에만 취해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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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87년 12월8일 워싱턴에서 중거리핵미사일(INF) 폐기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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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러시아혁명에 대한 탁월한 분석가들도 그것이 초래한 폭력과 강제, 비효율과 ‘실험’ 실패에 대해서는 항상 난감했다. 침묵하거나 변호하는 일이 잦았다. 홉스봄만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핼릿 카도 러시아혁명 후의 폭력 현상에 눈감고 스탈린을 찬양해 조지 오웰을 비롯한 동시대 지식인들을 경악시켰다. 러시아혁명은 폭력 지배가 조직화된 시발이자 전형이었다. 러시아혁명의 광휘를 레닌주의의 일탈이나 스탈린주의의 야만으로 가려서도 안 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다. 볼셰비키의 정치적 이상과 대중들의 혁명적 역동성을 기억하며 동시에 소련 체제의 폭력과 구원 이데올로기의 인간 조작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유토피아적 망상의 늪에서 모래성 같은 혁명론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 불러와
100년 전 ‘러시아의 기적’은 20세기 내내 세계 도처에서 ‘구체제’와 단절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문명의 서광’이자 희망의 근거였다. 20세기는 여러모로 ‘미국의 세기’였다. 하지만 영향력의 측면에서 보면 20세기는 외려 ‘소련의 세기’였다는 말이 더 타당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세계 전역에서 사회를 변혁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10월혁명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 운동의 고양과 반제국주의 해방 운동의 확산은 직접적인 영향이었다.
다른 한편, 1920년대 유럽 파시즘은 모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숙주 삼거나 빌미로 상승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기원도 러시아혁명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러시아혁명의 가장 강력하고 장기적인 결과는 세계 공산주의 혁명 운동이 아니라 전투적 반공주의다. 러시아혁명 후 세계를 둘로, 즉 반공이냐 친공이냐(또는 ‘우리’와 ‘그들’)로만 이해하려는 이들은 모두 러시아혁명의 사생아다. 21세기에는 혁명에 대한 공포나 적대적 타자상이 낳은 ‘새로운 야만’이야말로 ‘앙시앵 레짐’일지 모르겠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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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고 전해지는 비텐베르크 교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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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종교개혁 시대, 종교국경을 해체하라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교황청의 면죄부 지침에 대해 95개 항목으로 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대학 성당 정문에 게시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이 극적인 묘사는 종교개혁 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널리 기억됐다. 그리고 전세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이날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자축해왔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하여 돌아올 10월31일엔 어느 해보다도 성대한 기념행사가 치러질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들도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500주년이라는 숫자만큼이나 특별한 의의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여러 단체들이 준비해온 500주년의 의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세계 복음화에 나서는 계기로 삼자는 보수주의적 관점,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쇄신하자는 리버럴한 도덕재무장론의 관점,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와 신앙의 공공성 확대를 모색하자는 진보주의적 관점 등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 논지의 이념적 편차는 크지만, 생각의 방식은 유사하다.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종교개혁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은 보편사적 사건이다’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이 무시간적 진리의 책이라는 주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는 종교개혁과 우리의 과제를 치밀하게 따져묻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종교개혁의 의의에 관해 무수한 말을 늘어놓지만, 정작 실천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10월31일의 기념식 역시 말만 무성한, 내실 없는 일회성 잔치로 그쳐버릴 우려가 농후하다.
제국종교에서 국가종교로의 이행
이와 관련해 한국 개신교는 어느 것도 철저히 쇄신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다른, 불온한 의도와 결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련의 프로그램들이 절정에 이르는 시점인 10월31일은 대통령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를 시기라는 점에서, 지난 2007년의 대선 정국처럼 개신교도가 총동원된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을 위해 종교개혁 담론이 이용될 것이라는 게 뼈대다. 다행히도, 이런 우려는 기우에 그칠 것 같다. 대통령 탄핵으로 대선 일정이 상당히 앞당겨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반면, 입에 발린 말만 넘치는 행사에 그칠 것이라는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종교개혁을 보편사적 사건으로 보는 한 이런 결과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16세기 유럽 역사의 일부라는 점을 종종 간과한다. 하여 보편사로서의 유럽 역사의 변두리로 우리를 편입시켜 종교개혁의 의미망 안에서 우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종교개혁 담론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식민지적 백성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말의 장치에 그치게 된다. 또한 쇄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쇄신할 수 없는, 현장성이 결핍된 이야기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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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운동가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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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정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역사와 종교개혁이 만나는 지점에 제국종교에서 국가종교로의 이행이라는 종교체제의 변동이 있다.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공인종교로 인준한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는 ‘제국의 상상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교황은 ‘제국적 통합체로서의 유럽’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즉 유럽은 제국적 통합체이고 교황과 교회는 그러한 제국적 체제로서의 유럽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제국적 체제로서의 유럽이 ‘국민국가적 체제로서의 유럽’으로 이행하고, 제국교회의 이상이 국가교회의 이상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근대적 역사의 출발점에 종교개혁이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는 ‘국경(border)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그 이전에는 ‘변경’(frontier zone)이 있었다. 변경은 이편과 저편의 명료한 경계 대신 이편이기도 하고 저편이기도 한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고 교류하는 장이다. 반면 국경은 이편과 저편을 나누는 명료한 선이다. 국민국가란 이런 명료한 선으로 구획된 국가체제다.
이 점에선 종교도 마찬가지다. 제국종교 시대에는 종교간 경계가 불명료했다. 해서 지배세력들은 끊임없이 이단을 척결하는 정책을 발효했지만, 대부분의 대중은 경계 위에 있었다. 특히 변경지대의 대중사회에선 이웃 간에 이질적인 종교가 공존했고 종교간 혼합 현상도 빈번했다. 그런데 근대종교로서의 개신교에는 국경이 가설되었다. 교회 대중의 가슴속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분노, 적대감이 체화되어 종교 갈등이 엘리트만이 아니라 대중 사이에서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그러한 종교성을 낳은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18~20세기에 그러한 종교성을 지닌 그리스도교가 유럽 외부의 수많은 피식민지로 유입됐다. 물론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세력은 다양했지만 주도권을 쥔 것은 제국주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유럽적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이 한반도 역사에서 그리스도교가 늘 서구를 대변하며 존속한 이유다. 특히 미국 교회의 압도적 영향 아래 있던 개신교는 항상 친미 세력의 앞잡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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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성직자 암살 사건이 일어난 미국 뉴욕에서 지난 8월13일 이 사건을 규탄하는 시민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뉴욕의 무슬림들은 이 사건이 무슬림을 겨냥한 증오범죄라고 규탄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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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 지형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고 있다. 많은 종교인들, 심지어 종교국경에 가장 민감했던 개신교 신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종교의 국경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여 많은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과 불교, 심지어 무속 등의 종교적 진리들을 존중하며 그런 행동을 가시화하고 있다. 또한 비종교적 진리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개신교도들이 늘었다. 나는 이런 이들을 ‘멀티신자’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멀티신자는 한국에서뿐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이다. 그것은 지구화 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국경 더 높이 쌓기’와 ‘변경 만들기’
지구화 시대, 바야흐로 세계에는 국민국가의 국경을 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에 직면하여 국경을 더 높이 쌓고자 하는 자들과 새로운 변경을 만들려는 이들이 대립한다. 후자는 ‘타자에 대한 환대’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국민국가 체제로서의 유럽도 유럽연합 체제로 변동하면서 ‘환대’의 범위를 확장한 바 있다. 물론 그 환대의 제도화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적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럽연합의 등장은 국민국가의 국경을 전제로 발전해왔던 주권과 인권 개념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국경의 해체를 도모하는 종교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멀티신자’를 포함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귀속성 없는 종교성’ 등의 개념이 공통으로 담고 있는 취지는 종교국경 너머를 향해 열린 종교성의 모색에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왜,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를 다르게 고민해야 한다. 바야흐로 포스트종교개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시대엔 국가종교, 그러한 종교성을 향한 제도화가 추구됐다. 하지만 포스트종교개혁의 시대는 종교국경의 해체, 경계 너머 타자에 대한 환대의 종교성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다. 교회는 그렇게 이웃을 대하고 섬기며 존경하는 방향으로의 쇄신에 직면해 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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