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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03 19:30 수정 : 2016.05.03 19:30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유엔을 비롯한 현대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과 지정학적 경쟁, 인권의 정치도구화 때문에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인권유린의 근본원인까지 파헤쳐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개인권리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행진 앞에서 개개인의 사소한 권리는 뒤로 좀 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숲만 볼 줄 알지 나무의 문제를 못 본 것이다.

작년 이맘때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있는 ‘2층’이라는 카페에서 공개토론 모임이 열렸다.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되던 ‘2층’은 문화공연 공간이자 시민운동의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그날 모인 참석자들은 파키스탄의 분리주의 세력과 보안군이 충돌하고 있는 발로치스탄주에서 일어나는 주민 실종 사태에 관한 증언을 듣고 인권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밤 9시쯤 행사가 끝난 후 카페 운영자 사빈 마흐무드는 자기 차를 몰고 귀갓길에 올랐다. 출발한 지 몇 분이 채 안 되어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사빈은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마흔살의 열정적인 여성 인권운동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멀티미디어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빈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에서 ‘2층’ 카페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오아시스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카페 운영만이 아니라 인권 캠페인과 사회운동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온라인에서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힘썼던 사람이었다. 사빈의 죽음은 오늘날 이슬람권의 인권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용의자를 잡고 보니 명문대를 나온 젊은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는 사빈이 밸런타인데이를 공공연하게 축하하고, 테러를 지지하는 이슬람 성직자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이슬람 정신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러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파키스탄 사회가 이슬람 원리로 똘똘 뭉쳐야 하는데 감히 개방성과 다원주의를 설파한 게 괘씸해서 죽였다고 당당히 고백했다고 한다. 배후가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라치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 매년 수백건의 표적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인권운동가에 대해서까지 극단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면 간단치가 않다. 진상을 규명하고 배후를 파헤치고 범인을 처벌하고 유가족에게 배·보상을 하고 유사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조처를 취할 수 있으면 아마 최선의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통상적 해법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해법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사건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져 있다. 카라치 지역 정당들의 혈투, 그 배후에 깔린 토지와 권력 쟁탈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권화를 둘러싼 갈등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만으로 사빈의 암살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이슬람권에서 커지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21세기의 세속주의, 정교분리 원칙과 충돌하는 경계면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닐까.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슬람 근본주의를 오늘날 이렇게까지 키운 것은 중동의 지정학적 요인과 서구의 지배전략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지 않을까.

사빈의 암살을 암살자의 범행으로만 본다면 직접적 가해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근본원인까지 감안한다면 설명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인권침해는 전자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그 어떤 인권유린 사건도 근본 원인까지 속속들이 파헤쳐 끝장을 보는 식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바로 이런 것이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이다.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물리적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치를 떨지만, 그런 침해를 일으키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렵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이 문제는 인권 연구에서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왜 미시적이고 가시적인 인권침해에만 집중하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인권침해엔 무심한가.

인권에 접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 바로 눈에 보이는 폭력과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것이다. 이것을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인권침해를 시정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인권 담론의 9할 이상이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에 속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현대 인권 담론이 만들어진 1945년부터 약 20년간의 문제의식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유엔을 비롯한 현대 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45년 제정된 유엔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제연합의 인민들은 우리 일생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의와 조약 및 기타 국제법의 연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에 대한 존중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조건들을 확립함으로써, 더 많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촉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즉 유엔의 목적인 안보(평화), 인권 및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의와 국제법을 피상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중될 수 있는 심층 조건들을 확립하겠다고 한 것이다.

1966년에 나온 A, B 국제인권규약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인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되는 경우에만 달성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권리 보장의 전제조건을 다룬 28조에서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나와 있는 권리들과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 내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선포했다. 즉 인권 달성을 위해서는 개별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개별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수립만으로는 미흡하고, 보다 깊은 차원에서 권리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 조건과 사회적·국제적 질서가 갖춰져야 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을 뭉뚱그려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이라고 불러보자.

그러나 현대 인권 담론의 발생 초기에 이렇게 강조되었던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은 냉전과 지정학적 경쟁, 인권의 정치도구화 때문에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완전히 잊혔다. 그와 함께 국제인권 조약체계가 인권 담론에서 정전적(正典的) 방법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또한 근본 차원에서 인권 달성을 방해하는 거대 권력의 존재도 문제가 되었다. “권리의 향유를 가로막는 수많은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장벽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장벽은 권리를 차단하는 권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뜻한다.” 브룩 애컬리의 말이다.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현존하는 사회적·국제적 질서에서 패권을 차지한 자본주의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근본적 차원의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에 의한 인권 달성은 이상적이긴 하나 실천 불가능한 방법론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인권을 달성하려면 인권문제 해결과 인권조건 형성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별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는 노력과, 민주적이고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함께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개인권리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행진 앞에서 개개인의 사소한 권리는 뒤로 좀 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숲만 볼 줄 알지 나무의 문제를 못 본 것이다. 오랫동안 인권 담론에서는 거시적 조건이나 사회과학적 통찰을 접어두고 개별 권리침해의 사실관계 조사와 법적 해결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를 재발견하는 일이 21세기 인권운동의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었다. 나무도 살리고 숲도 함께 가꿔야 한다. 눈을 들어 넓고 멀리 봐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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