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져 범죄 동기 분류표에 이 말이 포함되었다. 한국에서도 강남역 사건 이후 증오범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조짐이 보인다.
증오범죄는 인간의 차별과 배제를 금하는 인권의 근본원칙에 대한 도전이다. 차별과 증오범죄는 연속선상에 위치한 유사한 성격의 두 얼굴이다. 증오범죄의 슬로모션이 일상적 차별이라면, 일상적 차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힌 것이 증오범죄라 할 수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최근 전세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 5월17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20대 여성이 한 남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6월12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나이트클럽에서 고객 49명이 오마르 마틴이라는 무슬림에게 피살되었다. 6월17일, 영국 노동당의 조 콕스 의원이 극우 정치 성향의 토머스 메어에게 살해되었다. 6월22일,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전통음악 카왈리의 가수왕 암자드 사브리가 총에 맞아 숨졌다. 세속 음악과 예술을 금기시하는 탈레반의 소행이었다.
이들 사건은 이욕, 사행심, 보복, 가정불화, 호기심, 유혹, 우발성, 현실불만, 부주의 등 경찰에서 말하는 통상적 범행 동기가 아닌 범죄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추측이긴 하나,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세속적 규범과 가치에 대한 적대가 깔려 있는 사건들이라 생각된다.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언론과 정치인들이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연방수사국(FBI)과 법집행기관에서 범죄 동기 분류표에다 이 말을 포함시켰다. 강남역 사건 이후 우리 언론에도 증오범죄, 혐오범죄, 증오테러 등의 표현이 많이 등장했다. 앞으로 증오범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조짐이 보인다. 다음은 증오범죄에 관한 9문 9답이다.
1. 증오범죄는 개인들 간 문제인가?
증오범죄는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해자는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범죄행위의 범위 역시 단순 차별로부터 민족 멸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 어떤 사람이 한 게이에게 주먹질을 한 것도 증오범죄이고 나치독일이 유대인 집단을 대량 학살한 것도 증오범죄다.
2. 무엇이 증오범죄이고 무엇이 아닌가?
증오범죄는 “인종, 피부색, 종교, 젠더,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장애 등의 근거로 형성된 적대 혹은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증오범죄는 오해되기 쉽다. 모든 증오가 범죄로 연결되진 않으며, 혐오가 얽힌 범죄라 해서 모두 증오범죄는 아니다. 직장에서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힌 동료를 증오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을 증오범죄로 볼 순 없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구체적인 증오를 품었는지의 여부도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 아니다. 피해자 개인은 증오하지 않지만 그가 속한 집단을 싫어하므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증오범죄이기 때문이다.
3. 증오범죄의 핵심요소가 무엇인가?
증오범죄의 핵심은 피해자가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의 성격에 대한 ‘미움과 혐오’(아니무스)에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집단귀속성, 즉 인종이나 성별, 성정체성 등은 어떤 본질을 가진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분류되고 사회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어떤 측면을 절대적 기준처럼 취급하여 그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떤 고정된 특성을 가졌다고 단정한 후 그들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증오범죄는 힘센 집단과 약한 집단 사이의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바버라 페리가 이를 잘 지적했다. “증오범죄는 오명이 부여되고 주변화된 집단에 가해지는 폭력과 위협이며, 주어진 사회질서의 위계구조가 불안정해질 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를 가진 권력과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증오범죄는 실제로건 상상으로건 가해집단의 흔들리는 헤게모니와, 피해집단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종속적 정체성을 동시에 재창조하려는 시도이자, 자아와 타자 간의 ‘적절한’ 상대적 지위를 재설정하여 양자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수단인 셈이다.”
4. 증오범죄의 목적이 무엇인가?
피해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만이 증오범죄의 목적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주장을 퍼뜨리는 것도 목적이 된다. 그런 뜻에서 증오범죄는 ‘메시지 범죄’이기도 하다. 나는 증오범죄가 발신하는 메시지의 수신자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증오범죄 메시지의 ‘직접 수신자’는 개별 피해자다. 전체 이주노동자들은 ‘연계 수신자’가 된다. ‘이 나라에 남아 있으면 너희들도 언젠가는 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간접 수신자’는 일반대중이나 정부를 말한다. 이주노동자 수용정책을 실시하면 이런 범죄를 계속 일으킬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5. 누가 증오범죄를 저지르나?
개별 증오자가 아닌 증오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미국 전역에 892개 증오집단이 있다고 하나 이들은 전체 인구의 0.01퍼센트도 안 된다. 그러나 인터넷과 전자 미디어 덕분에 이런 미꾸라지들이 전체 공론의 장을 흐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보스턴에서 발생한 169건의 증오범죄를 조사하여 가해자들의 동기를 밝힌 연구가 있었다. 첫째, 증오범죄의 3분의 2가 청소년들의 열광심리와 폭언과 폭행 등 단순 난동에 의한 것이었다. 둘째, 방어적 증오범죄가 그 뒤를 이었다. 가해자는 피해자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 영역, 지위, 생계, 존재기반이 위협받는다고 인식하고, 자신에게 방어할 권리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자신이 행하는 폭력이 공격이 아니라 정당방위라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셋째, 보복적 증오범죄는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야 마땅하다’는 식의 대응을 말한다. 9·11 이후 아랍계 주민에 대한 공격이 이에 해당하는데 전체 범죄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명감에 의한 증오범죄가 있다. 도덕적 대의명분을 확신하는 이데올로기형 증오범죄인데 흔히 극우파들의 조직적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에 의한 증오범죄는 1퍼센트 미만에 불과했다.
6. 증오범죄의 원인이 무엇인가?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해 실제적·가상적인 위협을 느낀다. 피해자들 때문에 자기 삶의 기회, 삶의 방식, 사회경제적 지위, 신념체계 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주관적 불안이 증오범죄의 배경 원인을 이룬다. 또한 정치·경제·인구학적인 변동이 주류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확실성을 초래할 때 이런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공격할 동기가 생긴다. 주류문화와 비주류 하위문화가 서로 많이 다를 때 후자가 전자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는 우려가 커진다. 여기에 더해 범죄를 촉발할 수 있는 매개적 사건이 있으면 심각한 증오범죄가 발생하곤 한다.
7. 증오범죄는 피해자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증오범죄는 일반범죄보다 훨씬 심각하고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피해자가 속한 집단 전체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이를테면 부잣집만 골라 턴 강도 소식을 접한 부자들보다, 어떤 성소수자가 당한 피해 소식을 접한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공포가 훨씬 더 크다. 피해집단 구성원들의 주관적 경험과 위험의 예감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그것 자체가 현실의 생생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8. 증오범죄가 인권에서 왜 중요한가?
증오범죄는 인간의 차별과 배제를 금하는 인권의 근본원칙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차별과 증오범죄는 연속선상에 위치한 유사한 성격의 두 얼굴이다. 증오범죄의 슬로모션이 일상적 차별이라면, 일상적 차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힌 것이 증오범죄라 할 수 있다.
9. 증오범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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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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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정책, 일반 사회정책, 사상적 대응이 모두 필요하다. 잠재적 피해 집단에 대한 예방적인 보호 조처 그리고 가해자의 가중처벌도 모색해야 한다. 증오범죄 방지법을 별도로 제정할 수도 있고, 증오범죄 예방까지 염두에 둔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주의 범죄학의 시각이 대폭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적 절망의 늪을 비우는 일도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인권교육과 세계시민의식 훈련이 근본대책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증오범죄에 대해 예민한 경계심을 유지하되 자기충족적 예언이 현실화할 위험도 피해야 한다. 충격적으로 보이는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도덕적 공황에 빠지지 않는 사회과학적 균형 감각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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