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먼 레빈슨이라는 미국 법률가가 있었다. 1차대전의 참화를 목격한 그는 전쟁을 합법화한 것이 인류 최악의 실수였다고 확신했다. 살인을 금하는 법은 있는데 전쟁을 금하는 법은 왜 없단 말인가. 그는 전쟁을 없애려면 군축이나 국제연맹을 통한 중재보다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는 길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믿었다.
지난 몇년 사이 전쟁 불법성의 원칙이 후퇴하는 징조가 농후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은 전쟁을 불법시한 부전조약과 유엔체제의 질서가 후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질서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다.
지난주 정전협정 65돌을 맞아 <한겨레>가 뽑은 헤드라인은 “65년 유예된 평화… 눈앞에 온 종전선언”이었다. 65년이나 미뤄진 평화라니, 자괴감이 엄습하면서 어떻게든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더해진다.
인권과 평화는 동일한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인권이 평화의 토대가 되고, 평화가 인권을 보장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첫 줄부터 인류 가족 모두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할 때 평화적 세계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호소한다.
존 험프리가 작성했던 선언의 초안은 더 직설적이다. “전쟁이 폐지되지 않는 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전쟁이 65년이나 연장된 상태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어온 건 사실이다. 방어전쟁이나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전쟁을 제외한 모든 전쟁은 원칙적으로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징조가 뚜렷하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코소보 공습,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중국의 남중국해 도서 점령,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격 등이 대표 사례다.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개탄할 때 그 밑바닥에 ‘전쟁이란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라는 가치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와 정반대였던 시대가 있었다. 전쟁이 정당하고 바람직하고 합법적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국제법의 창시자로 꼽히는 휘호 흐로티위스의 합법 전쟁론을 보자. 1603년 싱가포르에서 포르투갈의 대형 범선 산타 카타리나호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병들에게 나포되어 화물을 압수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를 당한 포르투갈이 발끈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부도덕한 해적 행위라는 부정적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엄청난 부를 잃고 싶지 않았던 회사의 주주들은 흐로티위스에게 법적으로 유리한 논거를 만들어달라고 자문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전쟁과 평화의 법에 관하여”는 원래 사건보다 훨씬 큰 주제를 다룬 문제작이 되었다.
흐로티위스는 국가가 어떤 이유든 근거를 제시하면서 전쟁을 벌이면 그런 전쟁은 정당하다고 본다. 국가와 국가 사이를 규율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권위(세계정부)가 없으므로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전쟁은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라는 이유에서다.
흐로티위스는 어느 나라가 타국에 의해 피해를 당한 후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만 해도 무력에 의한 침략과 점령으로 재산을 빼앗고 주민들을 다스릴 권리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전쟁은 부도덕하거나 범죄적인 행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국가정책이다.
교전국이 아닌 제3국은 그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그 즉시 적국으로 간주되어 공격 대상이 된다. 전쟁을 개시한 나라에 대해 제3국이 무역·경제제재를 가해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원수지간이 된다.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노력 자체가 불법으로 찍힐 가능성이 많았다.
이런 식의 국제질서가 극적으로 분출된 사건이 1차대전이었다. 비극이긴 해도 완벽하게 합법적인 전쟁이었다. 흐로티위스의 법논리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에도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우나 해서웨이와 스콧 셔피로는 <국제주의자들>에서 이러한 흐로티위스식 ‘구세계질서’가 ‘신세계질서’로 바뀐 과정을 추적한다. 새먼 레빈슨이라는 미국 법률가가 있었다. 1차대전의 참화를 목격한 그는 전쟁을 합법화한 것이 인류 최악의 실수였다고 확신했다. 살인을 금하는 법은 있는데 전쟁을 금하는 법은 왜 없단 말인가.
그는 전쟁을 없애려면 군축이나 국제연맹을 통한 중재보다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는 길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믿었다. 전쟁의 합법성을 전제로 한 채 이러저러한 제한을 추가하던 기존의 평화 구상들과는 달리 전쟁의 불법성을 전면에 내세운 레빈슨의 사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레빈슨이 주도한 ‘전쟁 불법화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1928년 8월27일 파리평화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흔히 켈로그-브리앙조약 또는 부전조약이라 불리는 이 약정으로 인해 사상 최초로 전쟁이 ‘불법’이 되었다. 이달 말이면 체결 90주년을 맞는 부전조약으로부터 ‘신세계질서’가 비롯되었다. 그 후 침략전쟁은 불법, 호전적 국가에 대한 외부 경제제재는 합법이 되었다. 패러다임이 180도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뜻은 좋지만 구속력이 없는 선언에 불과해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필두로 결국 2차대전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이 때문에 역사책의 각주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적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따른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은 부전조약에 가입했던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부전조약 이전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인정받았을 것이다.
합법화된 상태에서 일어나든 불법화된 상태에서 일어나든 전쟁은 전쟁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인지적 동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자의 전쟁은 상식, 정상, 규범으로 인식되므로 전쟁에 대해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얕고 좁아진다. 후자의 전쟁은 금기, 일탈, 범죄로 인식되므로 사람들은 비판적 관점에서 전쟁을 재인식하게 된다. 국가의 행동도 국제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2차대전의 본질이 흐로티위스식 구세계질서의 복원을 원하던 추축국들과 신세계질서를 꿈꾸던 연합국들 간의 투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후자가 승리한 후 작성된 유엔헌장은 부전조약을 그대로 계승했다. 헌장의 2조 3항이 “국제분쟁을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4항이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관해 무력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간다”고 되어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이 합법화된 상태에서 늘 전쟁이 일어나는 구질서와, 전쟁이 불법화된 상태에서 간혹 전쟁이 일어나는 신질서를 비교해보자. 전자는 일관성이 있고 ‘솔직’하지만 인간 고통의 총량은 크다. 후자는 일관성이 부족하고 위선적이지만 인간 고통의 총량은 적다. 부전조약 이전에는 보통의 국가가 타국에 정복당할 확률이 수십년에 한번꼴이었지만, 조약 이후에는 그 비율이 천년에 한두번 정도로 낮아졌다.
전쟁이 불법이 되었으므로 전쟁을 일으킨 책임자를 범죄자로서 처벌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졌다. 국제형사재판소의 로마조약 제정 20주년인 올해, 조약이 개정되어 지난 7월17일부터 침략범죄의 책임자를 개별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강대국이 많이 불참하긴 했지만 전쟁의 불법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적 사건이다.
위에서 말했듯 지난 몇년 사이 전쟁 불법성의 원칙이 후퇴하는 징조가 농후하다. 국가간 전쟁보다 국가 내 분쟁, 그리고 비국가 집단에 의한 테러 등이 늘어나는 경향도 보인다. 포퓰리즘과 무역분쟁도 좋은 조짐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대놓고 전쟁을 벌이거나 무력사용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생겼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은 전쟁을 불법시한 부전조약과 유엔체제의 질서가 후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질서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다.
요즘 세계정세가 워낙 불안정하여 평화의 사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의 평화 소식이 유일하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성이 크고 세계사적인 함의를 지닌다. 국제 평화애호 시민사회와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국지적, 예외적 차원이 아닌 보편적 차원의 평화 아이콘으로 격상시킬 때 그동안 어긋났던 세계사의 시간과 한반도의 시간이 정렬될 수 있다. 그날이 오면 동아시아 인권의 지평도 질적으로 확장될 것이라 생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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