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서문은 말 그대로 특별한 내용이었다. 경제 정책이 전세계적으로 인권에 미치는 악영향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 이런 서문을 실은 것은 처음이다. 경제의 인권적 함의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다는 방증이다.
노회찬 의원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국가인권위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 및 차별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시대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 보호를 확대하자는 개정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강조점이 바뀌고 있는 추세가 오늘의 주제다.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국제적 인권상황과 담론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인권은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의 문제이므로 국내 위주로만 인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권이라기보다 일국적 시민권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많은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전세계 인권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를 펴내는 대표적인 인권단체로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가 있다. 이들이 펴내는 연례보고서의 정확성과 공신력은 오랜 세월을 통해 입증되었다. 두 보고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서문에 이어 바로 각 나라 인권 상황을 소개한다. 국제앰네스티는 맨 앞에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태평양, 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지역별 개관을 먼저 제시한 후 각국에 대해 기술한다.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의 서문은 매년 특정 주제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작년과 올해, 계속해서 포퓰리즘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이 실렸다.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의 서문도 간혹 특정 주제를 다루곤 한다. 지난 십년 동안 서너 번 그런 글이 나왔다. 그런데 올해의 서문은 말 그대로 특별한 내용이었다. 경제 정책이 전세계적으로 인권에 미치는 악영향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 이런 서문을 실은 것은 처음이다. 경제의 인권적 함의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다는 방증이다. 인권을 개별적 권리침해 문제로만 보지 말고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다.
지난 토요일은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십년째 되는 날이었다.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의 날개가 꺾이고, 그런 식의 자본주의가 인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되었던가.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고, 빈곤층과 사회 약자에게 상대적으로 큰 혜택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경제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는가.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에게 책임 추궁은커녕 혈세를 풀어 구제해 주고, 아무 책임이 없는 애꿎은 서민들을 더 큰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공공채무에 따른 예산적자를 줄이기 위해 각종 지출을 삭감하고 부가가치세를 늘리는 등 긴축정책(austerity)이 보편화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인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가 되었다고 앰네스티는 진단한다. 그 결과 ‘타자를 악마화하는 정치’가 일상화되었다고 한다.
긴축의 타격을 받은 나라 사람들은 교사들이 빠져나가고 시설도 낙후된 학교에 자녀를 보내야 한다. 일자리가 줄고 실업상태가 길어져 우울증에서 암까지 온갖 건강 문제를 겪는다. 대출로 구입한 주택을 빼앗긴 후 낡고 좁고 춥고 습한 지하방으로 가족들이 옮겨간다. 사회보장 예산이 줄면서 노인들 돌봄 서비스도 대폭 축소되었다. 영국의 경우 긴축재정으로 인해 의료와 돌봄 관련한 사망자가 12만명이나 늘어났다.
긴축은 경제사회적 권리만 동결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이 가해지고, 치안 예산이 깎이면서 범죄율도 높아진다. 법률지원 제도가 축소되어 무전유죄의 가능성이 가시화된다. 시민정치적 권리도 땅에 떨어진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 극빈층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유엔 특별보고관은 긴축정책과 인권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권은 구체적인 침해가 일어난 후의 상황을 다루는 식으로 주로 발전해 왔으므로 긴축과 같은 특정한 경제정책―그것이 아무리 인권을 침해할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자체를 인권의 이름으로 미리 반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앰네스티는 이런 딜레마를 인정하면서도 인권의 이름으로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공식 정책의 결과에 대해 정치적으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일반시민들은 경제정책에 대해 정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
첫째, 얼마나 철저히 정책을 검토했는가. 둘째, 정책 결정 과정이 어느 정도나 참여적이고 투명했는가. 셋째, 그 정책이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어떤 잠재적 결과를 미칠 것인가. 넷째, 정책으로 인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되는 악영향을 경감할 조치를 미리 취했는가.
경제사회적 권리를 위해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것은 초보적 조치에 속한다. 더 나아가 앰네스티는 “특별한 시대는 근원적인 대안의 고려를 요구한다”고 선언하면서 대표적인 대안을 소개한다. 여기에는 보편적 기본소득과 필수 사회서비스의 국가 제공이 포함된다.
앰네스티는 세계인권선언 18조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그리고 19조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출발한 단체다. 그러나 1999년 포르투갈의 트로이아에서 열린 24차 국제대의원총회에서 경제 문제와 인권에 관한 연구와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오히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엔 반대도 많았다. <이코노미스트>는 앰네스티가 잘못된 길을 간다는 사설을 실었고, 전통적 지지자들 중에 단체를 탈퇴하는 이도 있었다.
인권을 오래 공부해 보니 기존의 인권문법 내에서 문제 해결에 치중하는 것보다 인권의 방향성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실감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노회찬 의원이 타계한 후 여러 추모들이 나왔지만 나는 특히 한 가지 기억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작년 11월 노 의원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국가인권위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 및 차별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시대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 보호를 확대하자는 개정안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노회찬 의원의 유지를 계승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참신한 방안이 아닐까 한다. 정부가 바뀐 뒤 국가인권위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적폐청산이 상자 내에서의 문제 해결이라면, 인권위의 행동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은 상자 바깥에서의 변화를 뜻한다.
애초 국가인권위 제도의 설계에 내포된 한계로 인해 한국에서 인권이 지나치게 직접적 침해와 차별 중심의 담론으로 귀결된 측면이 없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지금과 같은 식의 패러다임을 계속 고수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엇비슷한 인권 문제를 끝없이 다루어야 하는 제도적 병목에 빠지게 되어 있는 구조다.
한국의 인권운동은 미시적 권리침해를 다루되 그것을 넘어 국가인권위가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경제사회적 권리와 관련된 정책을 매섭게 추궁할 수 있도록 방향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으로도 인권이 이런 지향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앰네스티는 408쪽에 달하는 올해 보고서를 끝으로 내년부터는 온라인 버전으로만 출판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적 변화상에 보폭을 맞추고, 기후변화 시대에 종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의사가 느껴진다. 앰네스티 연례보고서는 1962년에 16쪽짜리 팸플릿으로 초판이 나온 이래 전세계 인권운동의 등대 역할을 해온 아이콘이었는데 큰 변신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깊다.
인권이든 그 무엇이든 시대에 맞춰 변하고 혁신해야 원래의 정신을 수행할 수 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렵다. 인권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되고 나면 제도와 조직, 전문지식의 성격, 인적 구성 등이 그것에 맞춰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인권에 관한 불만과 비판조차도 기존의 인식틀 내에서 개념화되고 제기되는 경향이 굳어진다. 앰네스티라고 그런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끊임없이 환골탈태하고 적응하려는 노력만큼은 평가할 만하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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